윤웅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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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3년) [[제3차 김홍집 내각]]의 [[경무사]](警務使)로 임명되었다. 그해 [[1월]] [[동지중추원사]], 2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갑오경장]] 때 [[군부 (대한제국)|군부대신]]으로 재직중, [[10월 12일]] 미국 공사를 비롯한 주조선 미외교관들의미국 외교관들의 협력을 얻어 [[조선 고종|고종]]을 궁성 밖으로 모셔나와 친일 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려던 [[친미파]]가 주도하여 발생하는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에 호응, 적극 내통했다가 실패하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의 집에 피신해 있었다. 그 뒤 [[중국]]으로 도피,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ref name="daum1"/> [[상하이]] 망명 생활 중, 그는 무예에 능하였으므로 [[조선]]에서 보낸 암살단을 스스로 물리친 뒤 은신하고 있다가 배편으로 [[인천항]]에 돌아왔다. [[1896년]] [[2월]] 귀국 직후,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3월 24일]] [[군부 (대한제국)|군부]] [[협판]]에 임명되었다. [[4월]] 육군 [[부령]]에 임명되어 친위군 제1연대장이 되었다.
 
그 해 5월 [[육군]] 참장(參將)으로 특진, [[군부 (대한제국)|군부]]협판(軍部協辦)에 임명되었으며 [[군부 (대한제국)|군부]]대신서리사무(軍部大臣署理事務)·법부 협판·[[의정부]] 찬정 등을 겸임했다.<ref name="daum1"/> [[1896년]] [[6월 26일]]에는 [[전라남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지만 고사하다가, 그 해 [[9월 2일]]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로 나갔다. [[전라남도|전남]] [[관찰사]]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건립되었다. 윤웅렬의 선정비는 광주향교 옆에 세워졌다. [[7월 18일]] 특명으로 [[전라남도 관찰사]]로 겸임 전라남도재판소판사(兼任全羅南道裁判所判事)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