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76번째 줄:
[[1895년]](고종 33년) [[제3차 김홍집 내각]]의 [[경무사]](警務使)로 임명되었다. 그해 [[1월]] [[동지중추원사]], 2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갑오경장]] 때 [[군부 (대한제국)|군부대신]]으로 재직중, [[10월 12일]] 미국 공사를 비롯한 주조선
그 해 5월 [[육군]] 참장(參將)으로 특진, [[군부 (대한제국)|군부]]협판(軍部協辦)에 임명되었으며 [[군부 (대한제국)|군부]]대신서리사무(軍部大臣署理事務)·법부 협판·[[의정부]] 찬정 등을 겸임했다.<ref name="daum1"/> [[1896년]] [[6월 26일]]에는 [[전라남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지만 고사하다가, 그 해 [[9월 2일]]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로 나갔다. [[전라남도|전남]] [[관찰사]]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건립되었다. 윤웅렬의 선정비는 광주향교 옆에 세워졌다. [[7월 18일]] 특명으로 [[전라남도 관찰사]]로 겸임 전라남도재판소판사(兼任全羅南道裁判所判事)에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