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렐로 라과디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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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882년]]에 [[미국]] [[뉴욕]]에서 [[이탈리아계 미국인|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출생 시의 이름은 '''피오렐로 엔리코 라과디아'''({{llang|it|Fiorello Enrico La Guardia}})였으나 나중에 미들 네임인 엔리코라는 이름을 [[영어]]식인 헨리({{llang|en|Henry}})로 바꾸었다. 가족들이 잠시 [[애리조나 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라과디아는 고등학교를 애리조나 주의 [[프레스콧 (애리조나 주)|프레스콧]]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미국 육군]]에서 잠시 복무하였다. 이후에는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에서 잠시 살았다가 [[미국]]으로 귀국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 [[트리에스테]]와 [[리예카|피우메]]에 주재한 [[미국]] [[외교공관|영사관]]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16년]]부터는 정계에 진출하여 [[미국 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에는 무소속이었으나, [[1922년]]에는 [[공화당 (미국)|미국 공화당]]에 가입하여 [[1933년]]까지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다만 [[1929년]]부터 [[1932년]]까지는 하원의원에 낙선하여 다시 법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인 [[1930년]]에 라과디아는 상점에서 빵 한덩어리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노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책임을 물어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과 방청객들에게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때 거둬들인 돈은 벌금 10달러를 제외하고 전액 노인에게 전달되었다. 위 일화는 매우 유명하여 여러가지 변형이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에 남겨진 사실은 아닌 듯 하다. <ref>{{웹 인용|url=http://www.snopes.com/glurge/laguardia.asp|제목=Fiorello La Guardia Legend|성=Mikkelson|이름=David|날짜=|웹사이트=|출판사=|언어=en-US|확인날짜=2016-09-08}}</ref>

[[1933년]]에는 [[뉴욕]]의 시장으로 당선되었고, 이 당시에 그는 뉴욕 시의 실권을 차지하고 있던 [[마피아]]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특히 마피아 두목들 중의 한 사람인 [[러키 루치아노]]가 자신에게 같은 [[이탈리아계 미국인]]라는 점을 들어서 뇌물 공여를 시도하거나, 협박을 가하자 이를 무시하고 루치아노를 검거하였다. 이때에 [[미국]]의 제32대 [[미국의 대통령|대통령]]으로 [[민주당 (미국)|미국 민주당]] 출신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을 발표하자, 라과디아 자신은 공화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루스벨트가 재선에 도전하자 이때에도 그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5년]]에 [[뉴욕]] 시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은퇴하였으나, [[1947년]]에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