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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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죽음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택을 습격하였으나 살해에는 실패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인 동군에 가담하여 승리하고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161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하고 돌아오던 중 병이 나 1611년 [[6월 24일]] [[구마모토 시|구마모토]]에서 죽었다. 50세.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면서도 도쿠가도쿠가와 아에야쓰와의이에야스와의 권력 앞에 자기 가문을 보존하려 애쓴 이중성 태도로 말미암아 일설에 의거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이에야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중재하려고 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평소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하게 하려고 계획한 이에야스의 미움을 사 독살되었다고도 한다.{{출처|날짜=2014-07-20}}
 
가토 기요마사가 사실상 주군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교체한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끝없이 패전한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은 안좋게 느끼고 무자비하게 대하였다는 등, [[임진왜란]]1군 지휘관 이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굴욕을 당하고 자신진영에 들어오던 [[군량미]]를 약탈시키는 등에 이유도 있었으며,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정권을 잡았을때는 그가 병악하고 그의 군사들의 승률이 낮다고 판단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를 통솔하였다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