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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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카 연합국 ===
7개의 딥 사우스 코튼 주들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사우스 캐롤라이나]], [[미시시피 주|미시시피]], [[플로리다 주|플로리다]], [[앨라배마 주|앨라배마]], [[조지아 주|조지아]], [[루이지애나 주|루이지애나]] 그리고 [[텍사스 주|텍사스]]의 순으로 [[1861년]] 2월까지 분리 독립하였다. 그래서 남부는 우선 7주가 독립하면서 1861~1863년까지 남부국기가 별이 7개가 있는 국기와 함께 [[파일:CSA FLAG 4.3.1861-21.5.1861.svg|22px]] [[아메리카 연합국]]이라는 새로운 남부 국가명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일곱 개의 주들은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메리카 연합국]]과 미국 헌법을 모델로 한 정부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섬터 요새에의 공격 이후, 링컨 대통령은 각각의 주로부터 의용군을 요청하는데, 그 후 2개월이 되지 않아 네 개의 [[노예 주노예주]]인 [[버지니아 주|버지니아]], [[아칸소 주|아칸소]], [[노스 캐롤라이나 주|노스캐롤라이나]]와 [[테네시 주|테네시]]가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남부군에 합류했다. [[1863년]] [[6월 20일]], [[버지니아 주]] 북서부 지방은 버지니아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주인 웨스트 버지니아로 북부 군에 합류했다. 그래서 남부 국기도 주가 더 늘었다는 이유로 완전히 다른 국기로 변경되었는데 바로 [[파일:Flag of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March 4, 1865).svg|22px]] [[남부맹방]]을 상징하는 국기가 새로 탄생하였다. [[1861년]] 말 [[미주리 주]]와 [[켄터키 주]]는 남부군 정부를 추방하고 북부군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 아메리카 합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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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마나사스와 버지니아에서, 몇 개의 최초 남부 연방 군대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장교 [[어빈 맥도웰]]의 지령하의 북부 연방 군대는 불런(Bull Run)에서의 첫 전투, 다른 말로 [[제1차 불런 전투]]에서 마나사스에 멈추었고, 맥도웰의 군대는 [[조셉 E. 존슨]], 그리고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의 지령 하의 남부 연방군에 의해 [[워싱턴 DC]]까지 후퇴하여야 했다. 남부군 장교 [[스톤월 잭슨|토마스 잭슨]]이 북부군에 대항하여 서있는 돌로된 벽 같다고하여 붙여진 "스톤월(Stonewall)"이라는 별명도 이 전쟁에서 붙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큰 손실에 놀라, 노예 유출의 심각성을 느꼈으며, [[노예 주노예주]]의 북부 연방 탈퇴를 막기 위해, 미국 의회는 그 해 [[7월 25일]], 그 전쟁의 목적이 노예제도의 종식이 아닌 주연합의 보존임을 정의하는 《[[크리텐든-존슨 결의안]]》(Crittenden-Johnson Resolution)을 가결시켰다.
[[파일:Sherman Grant Sheridan 1937 Issue-3c.jpg|240px|thumb|<center>셔먼 장군, [[율리시스 S. 그랜트|그랜트]] & 쉐리든</center><center>1937년 발행 우표</center>]]
[[파일:Generals Lee and Jackson-1937 Issue-4c.jpg|thumb|240px|<center>[[로버트 에드워드 리|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잭슨]], 1937년 발행 우표</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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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터요새 공격 ===
{{참고|섬터 요새 전투}}
[[1861년]] [[4월 12일]], 남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섬터 요새]]의 군사기지를 공격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링컨은 각 주에서 자원군을 모집하도록 요청했는데, 이 요청이 있자 4개의 남부 노예 주가노예주가 추가로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북군이 초반에 경계 주들에서 승기를 잡고 해상 봉쇄에 들어가자 양 군 모두 병력을 모집했다. [[1862년]] 9월,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을 통해 남부 주들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하는 것을 명백히 했고, 영국이 간섭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 게티스버그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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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링컨은 노예해방에 대한 성급한 시도는 경계주의 상실을 의미하며, [[켄터키 주]]를 잃는 것은 전체 전투에서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처음에 링컨은 경계주와 주전파 민주당원들의 충성심을 지키기 위해 당시 전쟁장관이었던 사이먼 카메론과 미주리주의 장군 존 프리먼트, 사우스 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의 장군인 데이비드 헌터 의 의견에 따라 노예해방의 시도를 모두 번복시키려고 했다.
 
[[1850년대]]에는 노예들이 거래, 해방, 도망 등으로 북쪽으로 주경계 지대를 탈출하였다. 이 지방에는 해방된 미국 흑인과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하부 남부지방보다 많았는데 이 때문에 남부지방은 노예제도가 급격히 사라질까봐 걱정하였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남부지방은 캔자스를 노예 주로노예주로 만들려고 더더욱 노력을 하였다. [[1860년]]에는 국경지방에서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세대의 수는 전체의 16% 밖에 되지 않았다. 노예의 몸값이 치솟아 오르자 하부 남부지방으로 팔려간 노예들은 돈이 많은 소수의 백인들만이 소유 할 수 있었다.
 
링컨은 보상형 해방과 자발적인 식민지화에 의존한 그의 단계적인 계획이 거절될 시에 더 혁명적인 해방정책을 사용하겠다고 주 경계 지대의 주들에게 경고하였다. 컬럼비아 특별구만이 링컨의 계획을 받아들였고 그는 [[1862년]] [[7월 21일]] 그의 내각의원들에게 노예 해방령에 대해 언급하였다. [[윌리엄 H. 수어드|윌리엄 수어드]] 장관은 링컨대통령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때 까지는 노예 해방령을 발표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너무 허술하면 실패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1862년]] 9월에 앤티텀 전투에서 이 기회가 만들어졌고 뒤이은 참모회의에서 링컨의 해방령에 대한 지지율이 더 높아졌다. 링컨은 이 전에 이미 특히 주경지방에게 연방을 구하려면 해방령을 인정해야한다고 촉진하는 편지를 출판했다. 링컨은 나중에 노예제도가 어쩌다보니 전쟁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링컨은 예비적인 노예 해방령을 [[1862년]] [[9월 22일]]에 발표했고 최종적인 해방령을 [[1863년]] [[1월 1일]]에 발표했다. 링컨은 하지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신념에 대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