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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파]]이다. 1872년 문과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거치며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고,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106100073 제9장 조선왕조의 울릉도·독도 재개발 정책] -월간 조선 2011년 6월호</ref>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준비부족으로 [[청나라]]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해 오랜 방랑 생활을 했다. [[청일전쟁]]의 발발 직전에 [[위안 스카이]](원세개, 당시 청국 실권자)의 동양 평화 주장 의견이라는 유인책에 의해 회유당하며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총살맞아 암살당하였고, 본국본국으로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돼부관참시당해 8도에 효수됐다효수당했다. [[청일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 순종|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됐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95776 '프라하의 연인'과 김옥균, 북촌을 걷다],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18일 작성.</ref>
 
본관은 [[신 안동 김씨|장동]]<small>(신 안동)</small>,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遇), [[일본]]식 이름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ref name="schihuchis">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328페이지</ref>)로, [[갑신정변]] 실패 이후 망명길에 지토세마루 호 선원 쓰지 도쥬로(辻藤十郞, 쓰지 가쓰자부로의 아들)가 지어줬다 한다.<ref name="schihuchis" /> 이와타 산와(岩田三和)란 이름도 사용했다.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으로 [[충청남도]] [[대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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