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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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
[[파일:ToyokuniJinja-Gate-M1745.jpg|thumb|250px|도요쿠니 신사의 정문]]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위암]], [[독살]]등 여러 설이 있다. 향년 62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그날 안으로 히데요시는 [[아미다 산]]에 매장되었다. 히데요시의 묘는 화려하게 조성되었지만, 병력의 사기 문제 때문에 조선에 출병되어 있는 왜군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였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무덤은 폭파되어 소멸되고 만다. 이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임진왜란의 원인이 된 장본인의 무덤을 처단함으로써 조선에 임진왜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쟁이였음을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 마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1615년 도쿠가와의도쿠가와 공격을가문의 습격을 받아 어머니 요도도노와 오사카 성에서 자결하는 바람에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끊어지고 말았다.
 
=== 임진왜란의 종료와 그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