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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자 동학농민군이 다시금 모여 대일 농민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12월의 패배로 봉기는 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마지막을 맞으며, 녹두장군으로도 불리는 전봉준도 [[순창군|순창]]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에 처형되었다.<ref name="임383"/><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3%B4%EC%9D%80&keyword=%EB%B3%B4%EC%9D%80 농민군에 장교들과 군인들이 토벌을 위해 나가다. 일본군에게 호궤하고 유일하게 지정된 처형법으로 교형과 총살을정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2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12월 27일(기사) 1번째 기사에서.</ref><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3%B4%EC%9D%80&keyword=%EB%B3%B4%EC%9D%80 전봉준과 그의 무리 5명을 비적으로 교형에 처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3월 29일(경자) 5번째 기사에서.</ref>
 
동학의 농민 무리들에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 초기의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단순 비적인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는 동학 농민군을 부정적으로 볼만한 이유와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녹두장군 즉 [[동학 농민 운동|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운현궁에 전봉준은 [[1890년]]에 찾아갔다. [[운현궁]]에서 [[전봉준]]은 [[1890]]년대 초반부터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0쪽</ref> 그 뒤 고향으로 내려간 [[전봉준]]은 또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봉준은 [[1893년]] [[2월]] [[흥선대원군]]을 방문하려 [[한성부]]로 올라가기도 했다.<ref name="chul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0499b001 전봉준의 배경과 출신]</ref>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잠깐 손님으로 와 있던 것 뿐이나 대원군대원군은 은전봉준에게전봉준에게 매우 후한 대접을 했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ref name="chul1"/> 이런 밀접한 관계로부터 [[전봉준]]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세간엔 돌았다.<ref name="chul1"/> 이런 한편 조선의 내정은 또 한 번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동원된 [[청나라]] 군대의 간섭을 받는다.
 
==== 개화당 제거 미수와 흥선대원군의 암살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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