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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비 확장과 정한론에 대해 알게되자 [[일본]]이 미구에 침략할 가능성이 있음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당 동지들에게 넌지시 비치기도 했다. 아울러 울릉도와 독도 해역에서 포경 사업으로 떼돈을 벌어가던 일본을 경계했다.
 
1883년(고종 20) 3월 귀국과 동시에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로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 兼 管捕鯨使)로 임명됐다. 이는 김옥균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사실 좌천이었다. 임오군란을 수습한 후 고종의 어심은 동도서기로 기울어 있는데다가 명성황후와 외척들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밀려난 결과였다.<ref>[[박영효]] 역시 한성 판윤에서 경기도 광주 유수로 좌천됐다.</ref> 그러나 외직에 나가서도 그는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 우선 [[울릉도]]에 남해안과 호남 출신 어부들을 정착시켜 무인도화를 막았다. 울릉도에 주민을 정착시키는 일은 가뜩이나 어려운 정부 재정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었으나 고종도 결단했다. 어쨌든 정착민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조선 때 지리 명칭인 우산도를 '돌섬'이라는 뜻의 호남 방언 '독섬'으로 불렀다. 이게 [[독도]]의 어원이 된다.
 
===== 민씨 척신, 척사파 세력과의 갈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