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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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교'''(朴泳敎, [[1849년]] ~ [[1884년]] [[12월 7일]]([[1884년]] [[음력 10월 20일]]))은 [[조선]] 후기 혁신파 정객으로 자는 자명(子明),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 [[시호]]는 [[충목]]이다. [[박원양]]의 아들이자, [[박영효]]의 형이다. 관직은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에 이르렀다. [[박규수]], [[유대치]]의 문인이다.
 
일찍부터 먼 친척이자 개화사상가인 재동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며 수학했고 이어 [[유대치]]의 문하에도 출입했다. 이어 동생인 [[박영효]] 역시 [[박규수]]와 [[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게 하여 수학케 했다. [[1881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1884년]] 동생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등과 모의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가담, [[승정원]][[도승지]]가 되었으나 3일만에 [[명성황후|왕비 민씨]]의 [[청나라]] 군대 요청으로 거사가 좌절되자 북관동묘까지 [[조선 고종|고종]]을 끝까지 호위하다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홍영식]]과 함께 살해당했다. 사후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