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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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에 [[일제 강점기 조선|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ref name="일출">{{저널 인용 |저자=권숙인 |날짜=2010년 2월 |제목=히노데소학교의 덕혜옹주 - 기억의 파편에 조우하며 |url=http://www.dbpia.co.kr/Article/3042112 |출판사=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저널=일본비평 |호=2 |쪽=252~266쪽}}</ref>{{rp|254}} 출산과 동시에 궁녀였던 양씨는 ‘복녕’(福寧)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아 귀인으로 봉해졌으며, 덕혜옹주도 ‘복녕당 아기씨’(阿只氏)라고 불리게 되었다.<ref name="일출"/>{{rp|255}}<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0505025_002&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B3%B5%EB%85%95%EB%8B%B9|제목=덕수궁 궁인 양씨가 딸을 낳으니 양씨에게 복녕이라는 당호를 내리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12-05-25}}</ref> 같은 해 7월 13일에 고종은 덕혜옹주를 복녕당에서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려 왔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0507013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B3%B5%EB%85%95%EB%8B%B9|제목=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가서 태어난 아지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돌아오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12-07-13}}</ref> 고종은 총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남 1녀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여 덕혜옹주가 사실상 유일한 딸이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203004_004&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B3%B5%EB%85%95%EB%8B%B9|제목=고종 황제의 행장|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19-03-04}}</ref>
 
[[1916년]] [[4월 1일]]에 [[고종 태황제]] 덕혜옹주를 위하여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명하였고<ref name="일출"/>{{rp|255}}, 쿄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로 촉탁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0904001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B3%B5%EB%85%95%EB%8B%B9+%EC%95%84%EA%B8%B0|제목=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여 복녕당 아기씨를 교육할 것을 명하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16-04-01}}</ref> 유치원은 [[준명당]]에 설치되었으며, 덕혜옹주는 귀족의 딸들 중 또래 7~8명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ref name="일출"/>{{rp|255}}<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14) 임신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608003292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6-08&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06&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6-08|확인일자=2012-11-30}}</ref> [[1917년]] 6월 [[왕공족]]의 신분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고종 막내딸, 日서 정신병 앓다 정략결혼한 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pho&sid1=103&oid=025&aid=0002239669|저자=이영희|출판사=중앙일보|날짜=2012-12-11|확인일자=2012-12-11}}</ref> 고종은 덕혜옹주가 영친왕 이은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 결혼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시종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26) 고종의 고심|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0600329209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7-06&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30&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7-06|확인일자=2012-11-30}}</ref>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에도 덕수궁에 머물다가 고종의 혼전이 [[창덕궁]]으로 옮겨지자 [[1920년]] [[3월 15일]] 모친인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 내 한 전각으로 거처를 옮겼다.<ref name="일출"/>{{rp|255}}<ref>{{뉴스 인용|제목=고 이태왕 전하 아기씨, 아기씨도 청덕궁에 가시었다|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00317u00_03.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0-03-17}}</ref>
 
=== 학창 시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