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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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5월 7일]] 좌부영관(左副領官)이 되었다가 [[음력 윤7월 15일]] [[경기도]] [[남양면|남양]][[부사]](南陽府使)로 발령되었다. 그러나 그는 육군 참령관(參領官)의 계급은 유지하였고, [[별기군]]의 훈련에 수시로 관여하였다.
 
[[1882년]] 별기군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ref name="윤치호1"/> 이후 좌부령관(左副領官), 전영장(前營將<ref>이때의 전은 전중후영의 전이다.</ref><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K19&moId=050&daId=200&gaLid=466&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1314442&Pos=18&TotalCount=343&vipyunid=undefined 남양의 속오 군병들의 봄 습조는 통리기무아문의 관문으로 인하여 정지하겠다는 장어영의 계]</ref>)을 거쳐 그해 [[5월]] 다시 통리기무아문사를 거쳐 남양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그해 [[6월]] 체직되었다. 그해 음력 윤 7월 다시 남양부사가 되었다. [[8월 27일]]에는 [[조선 고종|고종]]이 친히 [[별기군]] 기병대의 기예를 시험하자, 윤웅렬은 육군 정령관의 한 사람으로 시험에 참여하였다. [[1881년]] [[9월]]에 발생한 [[이재선]] 추대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투옥, [[9월 20일]]에는 [[이재선]]과 대질심문을 받았으나 혐의없음이 밝혀져 풀려났다.
 
윤웅렬은 [[일본어]],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다. 당시 [[일본]]에 조사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파견된 아들 [[윤치호]]는 농업학교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윤웅렬은 아들의 재능을 사장시킬까 염려하여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 등을 설득하여 [[도진샤]]에 입학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