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커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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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중화민국의 총통|중화민국(中華民國) 대총통]]과 [[중화제국|중화제국(中華帝國) 황제]]를 지낸 [[위안스카이]](袁世凱)이며 어머니는 [[조선]] 출신의 [[안동 김씨]](安東 金氏) 여인으로 아버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첩|측실]](側室)이었고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조선]] [[한성부]]에 머물러 있던 중에 출생한 그는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직후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족과 함께 [[조선]]을 떠나 [[청나라|청 제국(淸 帝國)]]으로 귀국하였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고 나서 이듬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성립되고 같은 해 [[2월 12일]] [[청나라]]가 멸망된 후에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장기]](將棋) 유단자와 [[마작]](麻雀) 유단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외에도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총통|대총통]] 영식(中華民國 大總統 令息) 시절부터 [[중화제국]] [[황자]](中華帝國 皇子) 시절까지 [[기녀]] 출신 [[측실]]을 무려 785명이나 거느린 희대의 호색 황자라는 [[중화제국]] [[황실]](中華民國 皇室) 짧은 1년 역사상 또 하나의 오명을 남기었고 한때 [[1915년]] [[12월 12일]]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중화민국의 총통|대총통]](大總統)이었던 아버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중화제국]](中華帝國)을 성립하여 [[황제]](皇帝)로 재위하였 시기에는 서자(庶子)이자 차남(次男)인 '''[[원극문|위안커원]]'''(袁克文) 자신이 [[왕위 계승|후계자(황위계승자)]] 1순위로도 거론된 바 있다. 그러나 이듬해 [[1916년]] [[3월 22일]] 아버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중국 국민당|중화국민당]]의 항거를 견디지 못하고 보위에서 쫓겨남으로 인하여 [[중화제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재성립되고 나서 그 해 [[6월 6일]] 아버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베이징 시|베이징]]에서 병사하고 난 후에 그는 다시 [[장기]](將棋) 및 [[마작]](麻雀) 유단자로서 일생을 지내었다. [[1931년]] [[톈진 시|톈진]]에서 향년 42세로 병사하였다.
 
그의 슬하 4남 3녀 가운데 셋째아들은 [[중화민국]] 태생의 [[미국]] [[물리학|물리학자]]인 [[위안자류]](袁家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