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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탁의 양자였던 중랑장(中郞將) 여포는 동탁의 뜻을 거슬렸던 적이 있었는데, 동탁이 화를 내면서 여포에게 수극(手戟)을 던졌다. 또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한 일 때문에 동탁에게 들통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여포는 평소 자신을 잘 대해주던 왕윤을 찾아와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자, 왕윤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여포가 가담할 것을 권유했다. 여포가 부자 관계 때문에 망설이자 본래 남남이었음을 강조하면서 동탁에 대한 미련을 버리도록 만들었다.
 
[[192년]] 4월 [[후한 헌제|헌제]](獻帝)의 병환이 나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미앙전(未央殿)에서 잔치가 열렸다. 왕윤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던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士孫瑞)에게 거짓으로 동탁을 주살하라는 조서를 쓰게 하여 여포에게 주었다. 여포는 이를 보고 고향친구 [[이숙 (삼국지)|이숙]](李肅)과 함께 북액문(北掖門)을 지키다가 궁궐로 들어오려던 동탁을 죽였다.(5월 22일, 음력 4월 23일)<ref>《[[후한서]]》 〈[[:s:zh:後漢書/卷9|제9권]]〉 “三年[...]夏四月辛巳,誅董卓,夷三族。” </ref> 조정과 백성들은 동탁의 죽음을 기뻐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윤을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고 의동삼사(儀同三司)가 되는 여포와 함께 조정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왕윤과 같이 있던 [[채옹]](蔡邕)이 동탁의 죽음을 알고 탄식하자 왕윤은 채옹을 죽이려 했다. 채옹은 살아남아 한나라의 역사를 저술하길 원했고, 태위 [[마일제]](馬日磾)도 채옹을 살려달라 청하였으나, 왕윤은 받아들이지 않고 채옹을 정위에게 넘겼다. 회심이 들었던 왕윤이 다시 옥사를 찾았을 때는 이미 채옹이 죽은 뒤였다. 이후 왕윤은 동탁이 죽자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서량병을 그대로 두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팔가집주>>에 따르면 1년에 대사면을 두 차례 행하는 것이 국법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관서의 잔당을 그대로 물린 것이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