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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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장기적으로 부하들을 응집시키는 데에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그 특유의 전투 지휘관 기질을 발휘하는 쪽으로 정치노선을 변경했고, 이를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ref>이는 [[#원인1]]과 일맥상통한다.</ref> 하지만 내정과 관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타나가리]]나 [[태합검지]]를 통해 병농분리와 노동력의 생산력 향상에 힘썼으며, 이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의 정책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간양록》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일본을 찾아온 조선의 사신에게 회답 서신을 만들게 하면서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말을 분명히 적게 했다고 한다. 휘하 가신들이 "일단 좋은 말로 회답 서신을 만들어 보내고 나서 갑자기 쳐들어가야 합니다."라고 간하자 히데요시는 "그러면 자고 있는 사람의 목을 치는 것과 뭐가 달라? 지금 솔직하게 써서 보내고, 그래서 상대방이 미리 준비하게 해준 다음에 승부를 내야지."라고 대답하며 듣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사람으로 사쓰마를[[사쓰마]](薩摩, 지금의 가고시마현 일대)를 오가면서 약 장사를 하던 [[허의후]](許宜後)가 일본의 사정을 상세하게 적어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려다, 이웃에 사는 명나라 사람에게 고발당했다. 잡아들인 허의후를 좌우에서 모두 삶아 죽이자고 했지만, 히데요시는 "저 놈은 명나라 사람이야. 제 조국인 명나라를 위해 적국인 우리의 일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나는 남이 생각지도 않는 틈을 노리는 건 싫어. 명나라가 미리 준비하게 하면 좀 어떤가? 그리고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다 초야(草野)에서 일어났어. 명나라에, 난 원래는 천한 사람이었소 하고 알리는 것도 해로운 일은 아니야." 하고서, 거꾸로 허의후를 밀고한 사람에게 "네놈도 명나라 사람이면서 같은 명나라 사람을 밀고하다니, 너야말로 추악한 놈이야!"라 욕했다. 그리고 허의후는 끝내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고 이 때문에 [[사이쇼 조타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글을 읽어주는 역할을 전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