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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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아버지 [[조선 도조|이춘]](李椿)의 사후 형인 [[이자흥]](李自興)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어린 조카인 [[이교주]](李咬住)를 대신하여 [[원나라]]의 천호(千戶)를 세습받아 재직하였고, 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세력(附元勢力)인 이복동생의 외척, 조씨(趙氏) 가문과의 대결에서 승리, 습직했으나, 그 후 원나라의 정책에 의하여 타격을 받게 됨에 따라 점차 원나라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이자춘은 [[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동조, 왕의 신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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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대륙에서 원, [[명나라|명]] 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반원(反元) 정책을 추진하던 [[고려 공민왕]]은 동북면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연결되어 있는 친원사대파(親元事大派)인 기씨(奇氏)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자춘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이자춘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하여 [[1355년]], [[고려]]에 투항하여 소부윤(少府尹)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와 더불어 동북면을 협공하게 하여 쉽게 이 지역을 점령하여 원의 간섭기 이래 빼앗겼던 동북 영토를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이로써 그는 그동안 뿌리깊게 대립하였던 친원 세력인 [[조소생]]을 제거하였다.
 
또한 이때의 전공으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이 하사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함경도|동북면]]을 떠나 [[개성특급시|개경]]에 머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