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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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3-6-26}}
{{전역상자 후한말}}
'''십상시의 난'''은 [[후한]] [[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에 [[십상시]]에 의해 발생하여 무려 2000명에 달하는 [[환관]]과 사람들이 죽은 사건으로 [[동탁]]이 이 사건을 이용해 권력을 잡았으며, 권력을 휘두르던 대장군 [[하진]]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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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연의의 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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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상시의 난 ==
[[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 [[십상시]]들은 [[하태후]]의 명령을 위조해 [[하진]]을 [[장락궁]]으로 불러들이고 [[하진]]은 결국 [[십상시]]들과 상방감 [[거목]]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에 [[하진]]이 죽자 하진의 부하 [[오광 (후한) |오광]]이 청쇄문 밖에 불을 질렀고 진군교위 [[조조]]와 사예교위 [[원소 (후한)|원소]]는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고 [[원소 (후한)|원소]]의 동생 [[원술]]도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여하면서 사태는 더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