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기동사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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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8월 27일 : 국방부 일반명령 제54호에 의거 [[영천시|영천]]에서 창설
* 1950년 10월 10일 ~ 1951년 3월 31일 : 낙동강 방어작전 이후 퇴로가 차단된 영호남 지역의 적군에 대한 소토 작전 전개라는 명목으로 빨치산 토벌 개시.
* 1.4후퇴시 빨치산공세가 강화되자 거창군 신원면에서 공비 토벌작전 중이던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공비와 내통하였다고 하여 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중화기로 무차별 학살하였고, 당시 희생당한 570명 중 젖먹이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327명이었고, 나머지는 노약자거나 부녀자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학살당한 사람들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빨치산 토벌 실적을 올리기 위한 희생자일뿐이었다. (현재까지 11사단 사료관에는 당시 토벌 숫자를 5천명이상으로 기록하며 주민 학살 한것을 실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해 3월 29일 이 사건이 국회에서 거창군 출신 국회의원의 보고로 폭로되었다. 국회는 조사단을 파견,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려 하였으나 당시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었던 대령 김종원은 국군 1개 소대를 공비로 가장시켜 습격하고 총격을 가함으로써 조사를 방해하였다. 그러나 국회의 재조사와 5월 8일 국회의 결의로 양민학살사건과 조사방해사건의 진상이 공개되자 내무·법무·국방 3부 장관이 사임하였고, 직접책임자인 9연대장 오익균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는 무기징역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에게는 3년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이들은 이승만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김종원은 경찰 간부로 특채되었다. 
*국회는 진상조사를 다시 시작, 거창을 비롯한 인근 함양·산청·문경·함평 등의 양민학살사건을 밝혀냈다.
*11사단은 현재까지도 전과로 포장하고 있으며 과오를 인정하지않고 있다.
* 1951년 4월 16일 : [[양양군|양양]]으로 이동하여 설악산지구 전투, 대관령지구 전투, 건봉산지구 전투, 1차 월비산지구 전투 등에 참여. 특히 건봉산지구 전투에서는 적 1개 사단을 격퇴
* 1952년 : 351고지 전투, 2차 월비산지구 전투, 간성지구 전투 등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