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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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로 [[내물 마립간]]의 7세손이다.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으며, 풍채가 청순하고 뜻이 방정하여 무리로부터 화랑에 추대되었다. 낭도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562년]]에 진흥왕의 명으로 [[이사부]]가 대가야 정벌에 나섰는데, 사다함은 15~6세의 나이로 왕에게 출진을 간청하여 귀당(貴幢)의 비장(裨將)으로 종군하였다. 사다함은 자청하여 선봉이 되었으며, 성문인 전단량(旃檀梁)을 기습하여 적을 당황시켰고 그 결과 크게 승리하였다. 이 공으로 가야인 300명과 전답을 받았으나 노비는 모두 풀어주고 전답 역시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받았다.<ref>{{서적 인용 |제목=[[삼국사기]] |저자=[[김부식]] |연도=1145 |장=[[: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二十三年...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百口 斯多含三讓 王
한편 학계에서 [[위서 (문헌학)|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은 [[547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사신(私臣)인 [[무관랑]]과 사통의 관계가 들키자 [[무관랑]]은 주변의 비난을 받게된다. 하지만 사다함은 [[무관랑]]을 불러 "나의 어머니의 죄일뿐 자네의 죄는 아니다'라면서 위로를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무관랑]]은 월성을 뛰어 넘던중 구지(溝池, 해자)에 떨어져 다리를 다친후 며칠만 후 죽게된다. 이를 원통하게 생각한 사다함은 오열을 하다가 병에 걸려 죽게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죽기 직전 [[풍월주]]의 자리를 [[미실]]의 남편인 [[노리부]]가 이어받는것이 합당하다며 그를 추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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