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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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초기 왜구토벌 ===
왜구의 침입이 [[고려]] 제30대 왕 [[1350년|충정왕 2년]](1350, [[고려 공민왕|공민왕]]의 조카)부터 본격화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려 우왕]] 때에 이르면 14년간<ref>* 비교,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1592) [[음력 4월 13일]] ~ [[1598년|선조 31년]](1598) [[음력 11월 19일]]까지 '''6년 7개월 동안''' 지속되었다.</ref> 378회(기간평균, 14년간 14일 간격)를 침입할 정도로 절정에 달하였다. 무엇보다도 해안가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심지어 [[강화도]]가 약탈당하고 도읍지 [[개경]]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으며 이때 정종의 조부 [[조선 환조|환조대왕]]이 개경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양광도]](楊廣道)에 왜구가 침입하여 개경을 위협하여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74832&q=판군기감사 판군기감사] 겸 [[병마사|서강병마사]]로 임명되어 나아가 왜적을 물리쳤다. 왜구는 단순한 해적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배후에 유력한 영주가 있어 그들에 의해 움직였다. 그 대표적인 영주가 [[대마도]]의 영주였다. 일본정부([[무로마치 막부]] 정권)에게 왜구 통제를 요구하였으나 진전이 없어 강경하게 대처하여 [[홍산대첩]]([[1376년]], [[최영]]), [[진포대첩]]([[1380년]], [[최무선]]), [[황산대첩]]([[1380년]], [[조선 태조]] [[이성계]]), [[관음포대첩]]([[1383년]], [[정지]]), [[대마도 정벌|대마도 1차정벌]]([[1389년]], [[박위]]) 등의 전쟁을 거치고 비로소 소멸되어갔다.<ref>* 출처, 《한민족 전쟁사 총론 (韓民族戰爭史總論)》(저자:이재 외 5인, (주)교학연구사 1988년 초판 출판), 144∼149쪽</ref><ref>* 출처, 《한민족 전쟁사 총론 (韓民族戰爭史總論)》(저자:이재 외 5인, 편저:육사 사학과, (주)교학연구사 1995년 재판본 출판)</ref>
 
이 시기에 정종은 [[1377년|우왕 3년]](1377, 21세) [[음력 5월]]에 [[조선 태조]] [[이성계]]를 수행하여 [[지리산]]까지 노략질하기 위해 진출한 왜구를 치는데 일조를 했으며, 기록상으로 이때부터 국왕 즉위([[1398년|태조 6년]], 1398)까지 약 21년 동안을 왜구토벌 등으로 전쟁터를 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