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커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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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북방을 담당한 잉글랜드 군대가 스코틀랜드 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 [[플랑드르]]에서 [[프랑스]]군과 싸우고 있던 중이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단려왕 필리프]](Philip the Fair)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에드워드 1세는 1298년 3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즉각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2차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원정의 준비과정으로 에드워드는 정부의 중심관청들을 [[요크]](York)로 이전하였고, 이렇게 요크가 임시수도 역할을 맡게 된 것은 향후 6년간 계속되었다. 4월 전쟁위원회가 요크에서 열려 스코틀랜드 공략을 위한 세부사항을 결정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유력인사들이 이 전쟁위원회에 참석하도록 초청되었으며, 불참자는 잉글랜드와 적대하는 자들이라고 선언되었다. 에드워드는 그의 군대에 6월 25일 [[록스버러]](Roxburgh)에 집결하라는 명을 내렸다. 에드워드가 모집한 군대의 규모는 대단했는데 [[장궁]](longbows)을 사용하는 [[웨일스]] 인들을 포함한, 2,000명 이상의 기병과 12,000명 이상의 보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7월 초순 에드워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잉글랜드 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Guardian of Scotland)가 된 [[윌리엄 월리스]]는 침략군의 보급을 저지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명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일부러 퇴각을 개시하여 잉글랜드 군으로 하여금 황량하고, 그들에게 적대적인 영토 깊숙이 끌어들였다. 에드워드왕의 보급함대는 기상 좋은상태가 날씨로악화되어 출항이 연기되었으며,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의 중심부로 진입했을 때 거의 굶주리는 상태였다. 특히 웨일스 보병대가 심하게 동요하였다. 잉글랜드 군이 [[에딘버러]](Edinburgh) 근교의 리스톤 사원(Temple Liston)에 진을 치는 동안 웨일스 보병대는 폭동을 일으켰고, 이는 잉글랜드 기병대에 의해 진압되어 80명의 웨일스 병사가 살해당했다. 에드워드는 불명예스러운 퇴각을 해야만 할 처지에 놓였고, 만약 이렇게 퇴각하게 된다면, 후에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은 이 스코틀랜드 원정을 주된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잉글랜드 군이 에딘버러에서에든버러에서 퇴각을 하려는 바로 그 때, 에드워드 1세는 윌리엄 월리스가 겨우 13 마일 떨어진 [[폴커크]] 근교의 칼렌더(Callendar) 숲에서 퇴각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기뻐하며 말했다. ''"신이 살아계시기 때문에....그들은 나를 추격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나는 오늘 그들과 싸울 수 있게 되었다"''
 
== 전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