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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한 군주주의자 왕당파였던 그는 독일군이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자 [[체트니크|유고슬라비아 육군 체트니크 분견대]]라는 [[유격대]] 조직을 조직하여 [[베오그라드]] 근교의 산중에서 싸웠다.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최초의 반독 투쟁이었으며, 그 뒤를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공산주의 파르티잔이 뒤따랐다.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은 처음에는 협력했으나 1941년 후반부터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항쟁하기 시작했다.
 
잡다한 민병 조직을 긁어모아 만든 체트니크가 파르티잔의 대독 투쟁 성과를 따라잡지 못하자 영국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꾸리고 있던 유고 국왕 [[페타르 2세]]에게 압력을 넣어 체트니크와 미하일로비치를 버리고 티토와 손잡을 것을 종용했다. 국왕에게 버림받은 체트니크는 독일군과 협력하게 되었고, 미하일로비치는 종전 이후 신생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공산 유고연방]]에 의해 체포되어 반역죄 및 전쟁범죄 혐의에 대해 유죄를사형을 선고받고 베오그라드에서 총살된다.
 
미하일로비치가 정말 전쟁범죄를 벌였는지, 만약 벌였다 할지라도 사형에 해당되는 극범죄인지 여부는 1940년대 당대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이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미하일로비치 사후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미국의 대통령|대통령]]은 그에게 공로훈장을 수여했으며, 2005년 세르비아 고등법원은 미하일로비치를 복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