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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일]]에 의하면 그는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이 박사의 생신날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오리고기|집오리고기]], [[닭고기]], [[쇠고기]] 등 온갖 종류의 귀한 식품들을 가져왔다.<ref name="choi92">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92페이지</ref>' 그러나 '그녀는 남은 음식을 돈암장 직원들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일부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결국 1주일 후에 음식들이 상했기 때문에 그 전부를 내버려야 했다.<ref name="choi92"/>'는 것이다.
 
그는 남북협상, 좌우합작론을 주장하다가 전향하여 [[이승만]]을 찾아온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했다. 이를 본 [[최기일]]은 '[[안재홍]] 씨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푸대접을 받고 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ref name="choi92"/>'고 증언한 바 있다. [[윤치영]]과 [[임영신]]은 "이박사님이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한국 여성과 산다면 좋을 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한탄하였다 한다.<ref name="choi92"/>
 
[[이승만]]의 비서인 [[박용만 (1924년)|박용만]]은 그녀와 수시로 충돌하던 사람 중 한사람이었는데, 그는 이승만 박사가 괄괄한 성품의 첫 부인과 이혼한 이후 그녀와 결혼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승만]]이 평생 후덕한 성품의 여성과 결혼하지 못했던 것을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