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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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구키》, 《제기》, 《구사》, 《고쿠기》, 《천황기》 와의 관련 ====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에 의해 일본 최초의 '국사'가 성립되기 전에도 각종 계도(系図)가 존재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게이타이 천황 즉 오오도노 오키미(オホド王)의 계도를 기록한 《조구키(上宮記, 또는 가미쓰미야노후미)》나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가 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만약 스이코 천황 때인 600년경 《조구키(上宮記)》가 성립되었다면, 게이타이 천황이 사망한 [[531년]]과는 70년의 차이가 있다). 덧붙여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편찬의 기본사료가 된 《제기(帝紀)》, 《구사(舊辞)》는 7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스이코 천황 20년([[620년]])에 "이 해에 황태자는 시마노 오오오미와 함께 의논하여, 천황기(天皇記) 및 고쿠기(國記), 오미(臣) · 무라치(連) · 도모노 미야쓰코(伴造) · 구니노 미야쓰코(國造) 180부와 공민(公民) 등의 본기(本記)를 기술하였다(是歲 皇太子、島大臣共議之 錄天皇記及國記 臣 連 伴造 國造 百八十部并公民等本記)"는 기록을 전하고 있지만, 이러한 야마토 왕권의 사서 편찬에 이바지한 정확하고 충분한 문자 기록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할 뿐더러, 그것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 대부분은 구비전승에 의지해야 했다고 추정된다. 이때 쇼토쿠 태자가 만들었던 역사서 《고쿠기》나 《천황기》는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 이루카(入鹿) 부자가 멸망할 때 대부분 소실되고 화재를 면한 일부가 [[덴지 천황]](天智天皇)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 한국계 사서와의 대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