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153번째 줄:
| 문화재청 = 13,04610000,11
}}
* - : 태평로1가 64번지 부근 광화문우체국 남쪽에 놓여진 다리이다다리다. 〈서울지도〉에 다리 표시만 되어 있을 뿐 이름은 알 수 없다<ref>〈서울의 하천〉 239쪽</ref>
* 모전교(毛廛橋) : 무교동 3번지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우전교(隅廛橋), 모교(毛橋),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도 불렸다. 모전(隅廛)이란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로, 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모전교로 이름지었다.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하였다. [[영조]] 때부터 모전교로 불리게 되었다.
* 광통교(廣通橋) : [[세종로|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이여서 옛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 (태종 10년) [[8월]]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다시 축조했을 때 [[정릉 (신덕왕후)|정릉]]의 석물로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니 이에 화가 난 [[태종]]이 [[왕자의 난|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여 왕위에 올라 강씨의 묘를 옮기며 일부 돌들을 모두가 밟을 수 있게 옮겨 놓은 것이다. 또한 그 돌들은 모두 거꾸로 놓았고, 석교로 만들어진 이 다리가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다리이다다리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밝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해, 그 때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 장통교(長通橋) :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했다. 형태는 하랑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장교동 [[한화그룹|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창교(長倉橋), 장교(長橋)라고도 했다. 이 부근에서 [[남산동천]]이 합류했다.
* 광제교(廣濟橋) : 지금의 장교동 20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로, 〈동국여지비고〉에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ref>〈서울의 하천〉 242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