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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과 전개 ==
=== 보불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 ===
[[1870년]]과 [[1871년]]에 걸친 [[프로이센]]과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제2제국]]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반발, 프랑스 [[민중]]들이 일으킨 항쟁이 파리 코뮌의 첫 시작이다.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체결되면서 그 해 2월 12일 강화조약을 토의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임시행정장관에 [[L.A.티에르|L.A. 티에르]]가 임명되었다.
[[파일:Barricade18March1871.jpg|left|thumb|300px|1871년 3월 파리 코뮌 참여자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
국민의회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비준했으나 파리 시민은 오히려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3월 1일 파리에 입성한 프로이센군은 파리 시민의 무언의 적의와 소극적 저항을 받으면서 3일 후에 철수하였다. [[3월 3일]] 국민방위대의 중앙위원회가 구성되어 티에르 정부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회는 구체제의 상징인 [[베르사유]]에 자리를 잡았고 파리 시민의 고통에 무관심하였다. 3월 18일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정규군에게 농성 중인 국민군(의용병)이 사용한 대포 227문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하극상을 보였고 르콩트와 토마 [[장군]]이 사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