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 이력 ==
'''[[오강부수 이건]]'''(烏江副守)에 봉작되고 '''[[오강정 이건]]'''(烏江正)으로 승작되었다가, 중의대부(中議大夫)로 승계받아 비로소 군에 봉작되었다. 그는 [[복성군]]의 양자로 지명되었지만 후사가 없었고, 스스로도 별도의 양자를 세웠으며, 양손자 [[평운군]]의 후손들은 20세기에 와서 그를 선조로 인정하였다.
 
== 일생 ==
=== 이력 ===
[[해안군|해안군 이기]](海安君 李㟓)의 여섯째 서자로 출생한 그는 초수 '''[[오강부수 이건]]'''(烏江副守)와 '''[[오강수 이건]]'''(烏江守)와 '''[[오강부정 이건]]'''(烏江副正)을 거쳐 두루 거쳐 봉작이 '''[[오강정 이건]]'''(烏江正)으로 승작되었으며 [[1569년]] '''오강군'''(烏江君)에 봉군되었다. 이듬해 [[1570년]]에는 이복 백부 [[복성군|복성군 이미]]의 양자(養子)로 출계하였다.
 
원래 복성군 미의 사후 양자로 [[덕흥대원군|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이 지명되었으나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그가 지명되었다. 그러나 오강군도 후사가 없어, 1580년 선조는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양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후일 선조의 서4남 신성군을 양자로 입후하였다. 선조는 오강군을 복성군의 양자로 지정하고도, [[1580년]] 다시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지명하여 [[유성룡]] 등이 종조부와 종손자 관계이며 중간에 아버지가 없다 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오강군은 후일 다시 친형 서천군 이금의 서자 철원부수 이의남을 양자로 입양했다가 관직을 받으려고 허위로 고했다 하여 [[1638년]](인조 16) [[12월 25일]] [[종부시]] [[도제조]] [[김세렴]]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