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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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군|해안군 이기]](海安君 李㟓)의 여섯째 서자로 출생한 그는 초수 '''오강부수'''(烏江副守)와 '''오강수'''(烏江守)와 '''오강부정'''(烏江副正)을 거쳐 두루 거쳐 봉작이 '''오강정'''(烏江正)으로 승작되었으며 [[1569년]] '''오강군'''(烏江君)에 봉군되었다. 이듬해 [[1570년]]에는 이복 백부 [[복성군|복성군 이미]]의 양자(養子)로 출계하였다.
 
원래 [[복성군|복성군 미의이미]]의 사후 양자로 [[덕흥대원군|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이[[조선 지명되었으나선조|하성군 이연]]이 내정되었으나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그가결국 [[오강군 이건]]이 [[복성군|복성군 이미]]의 양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오강군도 후사가 없어, 1580년 선조는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양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후일 선조의 서4남 신성군을 양자로 입후하였다. 선조는 오강군을 복성군의 양자로 지정하고도, [[1580년]] 다시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지명하여 [[유성룡]] 등이 종조부와 종손자 관계이며 중간에 아버지가 없다 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오강군은 후일 다시 친형 서천군 이금의 서자 철원부수 이의남을 양자로 입양했다가 관직을 받으려고 허위로 고했다 하여 [[1638년]](인조 16) [[12월 25일]] [[종부시]] [[도제조]] [[김세렴]]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39년]] [[4월 4일]] 노인직으로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승계되었으며, 이듬해 [[1640년]]부터 만성 신장풍과 만성 소갈증의 합병 증세로 와병하다가 8년 후 [[1648년]]에 향년 89세로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