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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진은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8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어, 큰 누나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 부인에게서 양육되었다. 천성이 혼후(渾厚)하고 침착하여 이미 어른스러웠으니,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말과 얼굴빛이 바뀌지 않았다.
 
[[1516년]]([[조선 중종|중종]] 1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1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곧이어 봉교(奉敎)·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특진되었다.
 
[[1528년]] 사헌부장령[[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를 지내고, 이어 장령·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관리의 탐학을 제거할 것과 농촌 진흥책을 제시하였다.
 
[[1534년]](중종 29)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었고, 1535년(중종 30) 6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1536년(중종 31)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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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인종 1) 1월 인종이 즉위하자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하였다 하여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546년]]([[조선 명종|명종]] 1) 명종이 즉위하여 이기(李芑) 등이 실권을 장악하자, 이기의 천거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후원으로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고, 2월 [[원종공신]] 일등에 녹훈되다. 같은 해 9월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정확립에 힘썼는데, 특히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실시에 노력하였다.
 
[[1548년]](명종 3) 6월에 지의금부사로 임명되고, 7월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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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년]](명종 4) 1월에 [[이기]]·[[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이조]][[판서]]가 되었고, 9월에 [[우의정]]에 올라서 [[이기]]·[[심연원]](沈連源) 등과 더불어 국정을 주관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에 온건론을 폈고,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하여 민원을 살피기도 하였다.
 
[[1551년]](명종 6) 8월에 [[좌의정]]에 올랐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ma_10608023_004 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 8월 23일 무인 4번째기사]</ref> 정승이 되어서는 [[심통원]]과 사돈을 맺고 척리(戚里)들과 체결하였다. 1557년(명종 12) 세자부(世子傅)가 되었다.
[[1558년]](명종 13) [[영의정]]이 되어 5년 동안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였다. [[영의정]]에 재임하는 동안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있어나자 이를 평정시켰으며 [[좌의정]] [[이준경]](李浚慶)과 더불어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
 
[[1561년]](명종 16) 가을에 임천(林川)의 선영(先塋)에 성묘를 하러 갈 때 왕이 상진의 손자 부솔(副率) 상시손(尙蓍孫)에게 명하여 역마를 타고 그를 호위하게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표피(豹皮)를 하사하였으며, 또 어사의(御蓑衣)를 내려주었으니, 이는 근세의 훈구(勳舊) 중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상진이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명종이[[조선 명종|명종]]이 비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대신(大臣)을 존경하고 노덕(老德)을 우대하는 뜻이다뜻입니다." 하였다.
 
[[1562년]](명종 17)에 나이 70세로 예(禮)에 따라 치사(致仕)하겠다고 하자, 허락되지 않고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잔치를 여는 날 [[문정왕후]](文定王后), [[인성왕후]](仁聖王后), 명종,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다 주육(酒肉)을 보내 왔으므로, 상진이 사전(謝箋)을 올리자 [[조선 명종|명종]]이 비답하기를,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듯이 나는 노덕을 귀하게 여깁니다. 12년 동안 재상으로 있는 일은 세상에 많지 않습니다. 어찌 노성(老成)한 사람을 물러가게 하겠습니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