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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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만약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논한다면, 남연군 이구가 바로 그 사람 입니다. 경박한 성품과 패악한 버릇 때문에 선비로 있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종친이 되어서도 옛날의 버릇을 고치지 않고 혼궁에 들어오자마자 병을 칭탁하고 집에 돌아가 평인(平人)처럼 고기를 구워 먹고 [[주사위]]를 던졌으며, 〈수원관(守園官)으로서〉 원소(園所)에 가서는 고을의 노예를 데리고서 [[용주사]](龍珠寺)의 꽃과 버들 속에 술에 취하여 평립(平笠)을 벗어버렸으며, 연지(蓮池)에 고기를 잡으면서 포건(布巾)을 거꾸로 썼습니다. 무뢰배를 불러 모아 백성의 가산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백리 안의 사람들이 가게를 닫고 도망해 피하였습니다. 악한 행실은 바로 짚자리를 깔고 거처하는 곳인데, 요사스러운 기생들을 데리고 와서 낭자하게 술을 마시고 즐기었으며, 혼궁 앞에서 가마를 타고 곧바로 들어오고, 침원(寢園)에서 가마를 타고 마음대로 달리는 등 흉패(凶悖)한 행동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습니다. [[능]]의 [[참봉]]을 바꾼 것으로 말하더라도 한달 전에 강제로 그 수종자(隨從者)를 바꾸고 곧바로 그의 형으로 차출하였으니, 이것도 조정을 얕잡아 보는 하나의 큰 안건입니다. 이와 같은 흉하고 더러운 무리를 결코 수원관이나 가까운 종친의 서열에 둘 수 없습니다.<ref>순조 19권, 16년(1816 병자 / 청 가경(嘉慶) 21년) 7월 13일(경신) 1번째기사, 이이희가 상소하여 남연군 이구의 악행을 고하므로 그의 관직을 삭제하다</ref>}}
 
그러나 [[조선 순조|순조]]는 입양의 형식이지만 자신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을 무마시키고 이이희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7월 15일]] 남연군에게 사람을 보내 위로하였다.<ref>순조 19권, 16년(1816 병자 / 청 가경(嘉慶) 21년) 7월 15일(임술) 2번째기사, 남연군이 대죄하고 있다고 하므로 체모를 손상할까 염려하여 대죄하지 말라고 하다.</ref> 1816년 [[12월 17일]] 중의대부로 승진했다. [[1817년]] 수원관으로 재직 중, 수원관 근무의 공로를 인정받아 [[12월 15일]] 안구마(鞍具馬)와 노비·전결(田結)을 상으로 받고, 1817년 [[12월 17일]]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남연군 집 하인들이 일반민의 재산을 빼앗았고, 남연군 집의 문객인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은 허위 문서를 만들어 타인의 채권을 가로채자 [[1819년]] [[형조]]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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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부교리 임안철(林顔喆)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남연군궁(南延君宮)의 하속(下屬)이 간사한 짓을 하고 공갈 협박하여 평민에게 해를 끼친 정상을 거듭 조사한즉,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 두 사람이 문하에 출입하여 도서 문적(圖書文蹟)을 청촉하여 만들어 내고, 타인의 채권을 궁전(宮田)이라 핑계대어, 지평(砥平)에 사는 고성인(高姓人)에게 전화(錢貨)를 강제로 수봉(收捧)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ref name="jangsam">순조 22권, 19년(1819 기묘 / 청 가경(嘉慶) 24년) 12월 9일(정유) 1번째기사, 형조에서 남연군궁 하속의 간사한 짓을 조사한 것을 아뢰다</ref>}}
 
순조는 '나이 어리고 마음이 약해서 남의 꾐에 빠져 이와 같은 패려궂은 짓을 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그 죄상을 논한다면 유방(流放)하여도 오히려 헐하다 하겠으나, 그 노모를 생각 하여 우선 보류하라. 남연군(南延君) 구(球)에게 삭판의 율을 시행하여 허물을 뉘우치고 몸을 신칙하게 하며, 잡인과 접촉 못하게 하고 궁속을 단속하여 개과 천선을 도모(圖謀)하도록 하라.'며 가볍게 견책하고 직책을 박탈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지었다.<ref name="jangsam"/> 그러나 1년만에 그는 다시 복직되었다. [[182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같은 해에 [[숭헌대부]]로 승진했다. [[1820년]](순조 20) [[7월 21일]] [[의녀]]를 잡아다가 종아리를 후려쳤다가 [[송상렴]](宋祥濂)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7월 25일]] 서용의 명을 받았다. [[1820년]] [[9월 7일]] 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9월 11일 개차되었지만 다시 9월 18일에 도총관으로 복직되었다.

[[1821년]] 가덕대부,[[1월 1일]] 가덕대부가 되고 이후 수릉관, 재궁상면상자서사관(梓宮上面上字書寫官) 등을 지냈다. [[1822년]](순조 22) [[3월 12일]] [[가덕대부]]가 되었다. 그해 [[3월 22일]] 생가의 아버지 이병원이 나이 71세가 되었음을 들어, 몽은(蒙恩, 노인에게 은전을 베푸는 것)을 상언하여 순조에게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