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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 {{대통령 정보}})
 
==생애==
[[1913년]] [[일본]] [[세소쿠가쿠엔 고등학교|정칙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 게이오의숙 의학부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기도 하다가 귀국해 [[상하이]]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상하이 생활 3년만에 영국으로 유학하여 에딘버러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으며, 유학 6년만인 [[1932년]] 귀국해 조용히 지냈다. <ref name="강준만"/> 8·15 해방이 되자 윤보선은 숙부 [[윤치영]]이나 부친 [[윤치소]]와는 달리 친일경력도 없고 영어에 능통한데다가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정치에 투신하기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ref> 심지연, 〈민주당 결성과 윤보선의 리더십 연구: 1960년대 초를 중심으로〉,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장면·윤보선·박정희: 196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백산서당, 2001), 106~110쪽. </ref> 이에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직을 지냈고 정부수립 후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2대 [[서울 시장]]을 지낼 때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ref>[http://www.seoul.go.kr/ 서울특별시 역대 시장] </ref> 1949년에는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1954년에 제3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제4대, 제5대, 제6대 국회에도 진출하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내각제|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인물평==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ref>지동욱, 박윤희 옮김, 《한국 대통령 8인 비극적 말로의 비밀》(사람의향기,2003) 74쪽. </ref>
 
==[[5·16 군사정변]]에 대한 의혹==
군사정변 당시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가족 관계==
* 아버지: [[윤치소]](尹致昭, [[1871년]] [[8월 25일]] ~ [[1944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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