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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글 (당시는 민주당. 65년에 민중당으로)
==약력==
=== 정치 입문 이전 ===
[[1924년]]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36년]] [[목포시|목포]]로 이사를 했고 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1943년]]에 [[전남 제일고|목포상고]]를 졸업했다. 김대중은 [[조갑제]], [[이도형]] 등의 극우논객들로부터 실제 성은 제갈씨이고, 과거에는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있으며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김대중을 자신들의 종친이 아니라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출처}}
 
=== 정치 입문 ===
졸업 후 목포일보 사장을 역임하고 해운업을 하던 그는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서울에 상경한 김대중은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하기도 하였고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ref>〈한국 노동운동의 진로〉, 《[[사상계]]》, 1955년 10월호.</ref>하는하면서 정계진출의 정계꿈을 진출을 준비하던 그는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키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김대중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장면을 통해 민주당에 입당한 김대중은 이 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해 연거푸 세 차례의 낙선을 맛보았고, 조강지처인 [[차용애]]의 자살로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낸다.
 
그러던 중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장면과 인연을 맺은 김대중은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가톨릭]] 영세를 받는다. 이 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해 연거푸 두 차례(5대 총선, 6대 총선)의 낙선을 맛보았고, 조강지처인 [[차용애]]의 자살로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낸다.
 
=== 금배지를 달다 ===
 
=== 평가 ===
김대중이 대통령에 오르면 독재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가 있을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으나 용서와 화합을 내세워 과거 독재정권의 관계자들을 대대적으로 사면시켰다. 김대중 자신이 민주화 운동으로 독재정권에게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라운 정치적 관용이다.
 
김대중 자신이 민주화 운동으로 독재정권에게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라운 정치적 관용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독재정권을 세울 수 없다는 자신감과 민주주의가 복수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대의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물론하지만 독재정권으로 상처입은고난의 사람들에게세월을 겪은 이들에게 상처를마음에 남길비수를 수도꽂았다고 있다는비판하는 비판이사람들도 있다.
 
과감한 경제개혁으로 조기에 경제위기를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새로운 남북관계의 지평을 열었다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정치 개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1인 보스정치 체재 청산에 소홀했다는 점과 고질적인 영호남 지역분열을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씻을 수 없는 오명으로 남았고, 이것은 후임 [[노무현]]의 짐이 되어버렸다.
과감한 경제개혁으로 조기에 경제위기를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새로운 남북관계의 지평을 열었다.
2000년 아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공로와 남북 화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대외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김대중은 대중적 카리스마와 탁월한 달변으로 강력히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남겼으나, 보수세력에게는 민주세력 무능론의 대명사로 여전히 낙인찍혀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정치 개혁에도 여전히 정치 수준이 후진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지역분열을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김대중 정권의 짐이 되었고 대부분 크게 해결되지 못한 채 차기 정부의 극복 과제로 남게 되었다.
 
김대중은 대중적 카리스마와 탁월한 달변으로 강력히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여전히 김대중은 진보세력에게는 위대한 민주주의 대통령으로 보수세력에는 이른바 민주세력 무능론의 대표격인 인물로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 비판 ===
 
 
; 햇볕정책
햇볕정책은 야당인 한나라당과 주요 보수 언론에 의해 실패로 지적되기도 한다. 북한의 독재정권을 유지시키고 핵무기 개발을 도왔다는 것이다. 일부 의견 중에는 대북자금이 그의 노벨상 수상을 도왔다는 비난도 있으나 그의 퇴임 후에는 야당조차도 그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그의 햇빛정책에 대한 비판은 자제하고 있다.
 
 
 
; 외환위기 대처
김대중 정부가 외환 위기에 대처한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다. 외환위기의 극복은 한국 경제의 체력을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는 일이라는 평가도 있으며, [[하버드 대학교|하버드대]]의 마틴 펠스틴은 ‘한국의 외환위기는 금융위기의 성격을 띄고 있을 뿐,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온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 독재정권과의 타협
자신에 대한 [[조중동]] 및 군사정권의 악의적인 색깔론 공세로 인해 이를 의식해 독재잔재의 청산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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