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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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월 3일 국무위원 개선에 앞서 송병조 주석의 정무와 예산 관계의 정무 보고가 있었다. 여기서 신익희와 윤기섭의 사표가 수리 되어 국무위원이 11명에서 9명으로 축소 결정 되었다. 후보 12명을 선거한 결과 양기탁 (주석)·송 병조 (재무)·조소앙 (내무)·김규식 (외무)·윤기섭 (군무)·최동오 (법무)·김철 (무임소)·조성환 (무임소)·성주식 (무임소) 등 9명이 당선되었다.<ref>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5페이지</ref>
 
그러나 중일 전쟁의 발발로 임시정부는 항주와 진강, 장사, 광주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연합군]]에 가담하여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ref>[[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지만, [[연합국 (제2차 세계 대전)#대한민국 임시정부|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에 승인 받진 못하였다.</ref>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일본]]에 선전포고하지만 한국 광복군이 미처 국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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