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자감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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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문종]] 때에는 국자감에 제거(提擧)·동제거(同提擧) 각 1명, 판사(判事) 1명, 제주(祭酒 : 종3품) 1명, 사업(司業 : 종4품) 1명, 승(丞 : 종6품)·국자박사(정7품)·각인 태학박사(종7품) 2명, 주부(主簿 : 종7품)·사문박사(四門博士 : 정8품)·학정(學正 : 정9품) 2명, 학록(學錄 : 정9품) 2인, 학유(學諭 : 종9품) 2명, 직학(直學 : 종9품) 2명, 서학박사(종9품) 2명, 산학박사(종9품) 2명 등의 인원을 두었고, [[고려 예종|예종]] 때 판사를 대사성(大司成 : 종3품)으로 바꾸었다.
 
국자감의 학과는 [[효경]]·[[논어]] 1년, [[상서]](尙書)·[[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각 2년, [[주역]]·[[모시]](毛詩)·[[주례]](周禮)·의례(儀禮) 각 2년, 예기·좌전(左傳) 각 3년을 전부 교수 받아야 하며, 율학·서학은 국어·설문(說文)·자림(字林)·삼창(三倉)·이아(爾雅) 등을 독서하여야 했다.
 
학생 수는 국자학·태학·사문학에 각각 300명으로 하였으나 많을 때는 600명까지 되었으며, [[고려 덕종|덕종]] 때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 학생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1101년]]([[고려 숙종|숙종]] 6)에는 국자감에 서적포(書籍鋪)라는 국립도서관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