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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 둔우(屯雨)와 혼수(混脩)문제.
한편 용제총화에 『중 둔우는 환암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경전을 탐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또 시에도 능하여 시사가 청절하여 목은ㆍ도은 등 선생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생략)일본 국사인 중 문계가 시를 구하여 진신(縉紳)중에서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스승도 또한 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생략)당시에 변계량이 문형을 주관하였는데, 쇄연무위(灑然無位)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하고, 항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마지않았다. 』라고 하였다.(성현, 용재총화 제6권) 성현이성현은 이글은 누가이야기를 거짓으로형인 작문한성간으로부터 것인지들은 것을 모르겠지만적은 것이라 하였지만, 만약이것은 성현이 하였다면,거짓말을 성현은한것이거나 거짓말을아니면 성간이 거짓으로 이야기로꾸며낸 만든이야기일 것이다뿐이다. 때문에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는 단순한 이야기 책이지 사실을 적은 역사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영의정 황희를 청백리로 둔갑시킨 것도 용재총화이다.
그 증거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중 둔우(屯雨)는 혼수(混脩)의 제자인데, 변계량이 문형(文衡)을 맡았을 때, 스승과 함께 일본인 승려 문계(文溪)가 시를 구하러 왔기 때문에 왕명으로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변계량이 쇄연무위(灑然無位人)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 하였다고 한 말의 사실 여부를 추적해 본다. 시는 아래와 같은 수국고정이다.
 
수국고정 / 水國古精
상쾌한 무위의 사람이로다(灑然無位人) / 빨리 달리는 것도 응당 스스로 그칠 것이요(火馳應自息) / 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오(柴立更誰親) / 풍악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楓岳雲生屨) / 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盆城月滿闉)/ 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風帆海天闊) / 매류는 고원의 봄이로구나(梅柳故園春)
 
먼저 둔우(屯雨)의 스승 혼수(混脩)는 조선이 건국한 1392년(태조 1) 9월 18일 입적하였다. 태조는 그를 위해 충주 소태면 오량리 청룡사지에 1394년에 부도(국보 제197호)와 탑비(塔碑)를 세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변계량은 태종 17년(1417)에 비로소 문형(文衡)이 되었는데,(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4월 21일 정축) 이때는 이미 혼수(混脩)가 입적한 뒤였기 때문에 제자인 둔우(屯雨)와 함께 왕명으로 시를 지을 수 없었다. 또 세종 22년 5월 20일, 일본(日本) 중 지융(知融)이 사리각(舍利閣)을 유람하고 자신의 스승 문계(文溪)가 15년 전에 조선의 산사에서 독곡 성석린(成石璘)에게서 받은 시를 지참하고 온 사실이 있어, 이로 미루어 일본 승 문계(文溪)가 세종 7년 무렵에 조선의 사찰을 방문한 사실은 있으나, 국왕을 방문한 사실은 없음이 확실하다.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 5월 20일 신유) 또한 사실이라 하여도 역시 혼수(混脩)가 죽은 후이니 “변공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라고 말하였다면 이는 거짓말일 수 밖에 없다.
또 세종 22년 5월 20일, 일본(日本) 중 지융(知融)이 사리각(舍利閣)을 유람하고 자신의 스승 문계(文溪)가 15년 전에 조선의 산사에서 독곡 성석린(成石璘)에게서 받은 시를 지참하고 온 사실이 있어, 이로 미루어 일본 승 문계(文溪)가 세종 7년 무렵에 조선의 사찰을 방문한 사실은 있으나, 국왕을 방문한 사실은 없음이 확실하다.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 5월 20일 신유)
또한 사실이라 하여도 역시 혼수(混脩)가 죽은 후이니 “변공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라고 말하였다면 이는 거짓말일 수 밖에 없다.
 
또 세종 30년(1448) 일본 승 문계(文溪)가 일본국 정사(正使)로 조선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휘덕전(輝德殿)에 진향(進香)하는 일과 대장경(大藏經)을 줄 것을 청하였는데, (세종실록 120권, 세종 30년 4월 27일 임오.) 변계량은 세종 12년(1430)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변계량이 문형의 지위에서 시구(詩句)를 넣고 빼고 할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에 전후 이야기를 미루어 보아 용재총화의 위 이야기는 모두 허황된 거짓말이 확실하다. 그 장본인은 반증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재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그 제자인 성현의 공동 조작으로 보아지는데, 그 이유는 천재에 대한 질투가 아닐까? 아니면 두 사람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에 시샘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케한다. 학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변계량 같은 사람은 반드시 명예를 회복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