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니에레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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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에레레는 사회주의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식민 지배자의 언어가 아닌, 탄자니아에서 널리 쓰이던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학교에서 교육시키도록 권장했다.(북아프리카 지역의 [[아랍어]] 사용 국가를 제외) 니에레레는 탄자니아의 사회주의 이념인 [[우자마]]를 주장하였다. 우자마 이념은 120개의 서로 다른 민족들이 국가의 통제아래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자는 이론이었다. 그 후 탄자니아에서 우자마는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나 니에레레의 우자마 경제정책은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농업 위주의 경제 정책으로는 탄자니아의 낙후된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산업화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자마 이념으로 탄자니아의 민족 통합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니에레레는 [[1978년]]에서 [[1979년]]까지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쫓아내기 위해 무세베니의 좌익 군대를 도와 우간다의 혁명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니에레레는 [[1985년]]에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후계자인 [[알리 하산 음위니]]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었다. [[1990년]]까지 타누당의 의장직을 맡았고 [[1999년]] [[영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향년 7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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