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힌골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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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로 일본의 대본영(大本營)에서는 사건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관동군은 이를 무시하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 공세를 취했다. 몽골과 상호 원조 조약을 맺고 있었던 소련군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5월 28일 [[니콜라이 블리디미로비치 페클렌코]]({{llang|ru|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Фекленко}})가 이끈 소련군 1,500여 명은 숫적으로 우세한 2,000여 명 이상의 관동군과 맞서 싸웠다. 병력 면에서 소련군은 열세였으나, 장갑차와 야포,자주포의 숫자와 성능은 소련군이 우세하였다.<ref>단, 전차는 양측에 모두 단 한 대도 존재하지 않았다.</ref> 소련군은 야포와 [[자주포]], 장갑차를 적절히 활용하여 일본군의 대응 전력을 먼저 격파한 다음 보병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일본군은 약 50-70%의 피해를 보아 전멸했으나 지상전과는 달리 공중전에서는 일본군이 우세했다. 이는 제 2차 할힌골 전투의 불씨가 되었다.
 
제1차 할힌골 전투를 승리로 이끈 페클렌코는 [[모스크바]]에서 훈장을 받았다. 몇몇 문헌에서는 페클렌코가 숙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하산 호 전투]]의 사령관인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와 혼동한 오류에 지나지 않다.<ref>[http://ru.wikipedia.org/wiki/%D0%9D%D0%B8%D0%BA%D0%BE%D0%BB%D0%B0%D0%B9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D0%BE%D0%B2%D0%B8%D1%87_%D0%A4%D0%B5%D0%BA%D0%BB%D0%B5%D0%BD%D0%BA%D0%BE] </ref> 페클렌코의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주코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