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옹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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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이름 = 은천옹주
|그림 =
|그림제목 =
|작위 = 궁인, 옹주
|재위 = [[1340년]] ~ [[1343년]]
|대관식 =
|전임자 =
|후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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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4 =
|재위4 =
|대관식4 =
|전임자4 =
|후임자4 =
|별칭 = 사기옹주(沙器翁主), 오지옹주,<br>궁인 임씨(宮人 林氏)
|시호 = 은천옹주(銀川翁主)
|배우자 = [[고려 충혜왕|충혜왕]]
|자녀 = [[왕석기|석기]]
|본명 =
|왕가 =
|왕조 =
|아버지 = [[임신 (고려 후기)|임신]]
|어머니 = 미상
|부모 =
|친척 =
|출생일 = 미상
|출생지 = [[고려]]
|사망지 =
|사망일 = 미상
|사망원인 =
|능묘 = 미상
|국적 = [[고려]]
|능묘좌표 =
|매장지 =
|매장지좌표 =
|거주지 =
|국적 = [[고려]]
|서명 =
|종교 =
|웹사이트 =
|각주 =
}}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 林氏, 생몰년 미상)는 [[고려]]의 제28대 [[왕]] [[고려 충혜왕|충혜왕]]의 제4비이다후궁(제4비)이다. '''사기옹주'''(沙器翁主), '''오지옹주'''<ref name="han">{{서적 인용
|저자= 박영규
|제목=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줄 63 ⟶ 28:
=== 가계 ===
 
상인이던 [[임신 (고려 후기)|임신]]의 딸로, 원래 종실인 [[단양대군]] 후(丹陽大君여종이자 珛)의그녀 여종이자역시 사기그릇을 팔던 상인이었다. 아버지는 역시 상인이었던 [[임신 (고려 후기)|임신]](林信)이다. 임신은 자신의 딸이 [[고려 충혜왕|충혜왕]]의충혜왕의 후궁이 되자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한때 임신이 [[기륜]](奇輪)을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 충혜왕은 임신을 옹호하면서 심지어 직접 가서 기륜의 집을 헐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임신은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압송될 때 함께 압송되었다가 후에 돌아왔다<ref name="limsin">[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c_A9999_1_0011361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임신〉항목]</ref>.
 
=== 왕비후궁 시절 ===
 
은천옹주는 [[1340년]](충혜왕 복위 1년) [[고려 충혜왕|충혜왕]]의충혜왕의 눈에 들어 입궁하였으나, 별다른 봉작 없이 '''궁인 임씨'''(宮人 林氏)로만 불리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c007&gunchaId=av027&muncheId=&finId=003&NodeId=&setid=1903212&Pos=2&TotalCount=4&searchUrl=ok 《동사강목》권14-상]</ref>. [[1342년]](충혜왕 복위 3년) [[음력 2월]] 충혜왕의 제3비로 [[화비 홍씨]](和妃 洪氏)가 책봉되었는데, 임씨가 이를 질투하여 충혜왕이 임씨를 '''은천옹주'''(銀川翁主)에 봉했다<ref>《고려사》권36〈세가〉권36</ref>. 하지만 사람들은 임씨가 사기그릇을 팔던 것을 비꼬아 '''사기옹주'''(沙器翁主), '''오지옹주'''라고 부르기도 했다<ref>《고려사》권89〈열전〉권2</ref>.
 
[[고려 충혜왕|충혜왕]]은충혜왕은 평소 [[열약]](熱藥)이라는 정력제를 복용하였다. 또복용하였고, 세자로 [[원나라]]에원나라에 있을 때 [[임질]]에 걸린 후<ref>{{서적 인용
|저자= 최용범
|제목=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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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7-09-10
|id= ISBN 978-89-5757-102-6
}}</ref>, 관계하는 여성들에게 이 병을 옮기기도 하였다. 당시 다른 여성들은 충혜왕의 정력을 감당해내지 못하였는거나 임질에 걸려 고생했는데, 은천옹주만은 이러한 충혜왕과 죽이 잘 맞고 충혜왕을 능히 감당해내어 더욱 사랑을 받았다<ref name="han"/>. 이런 은천옹주가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충혜왕이 시장에서 [[베]]와 [[비단]]을 강탈하여 폐백으로 주기도 했다주었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c_A9999_2_0008806&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B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은천옹주〉항목]</ref>.
 
은천옹주는 사치가 심한 성품으로, [[고려 충혜왕|충혜왕]]으로충혜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거처할 신궁을 짓게 하였다<ref name="han"/>.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당시 충혜왕은 신궁 건축에 동원된 무리들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나희]](儺戱), [[춤]] 등을 경연하게 하면서 시상을 하였는데, 이때 은천옹주도 50냥을 보태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궁을 지을 때 은천옹주의 명으로 [[맷돌]]과 [[디딜방아]]를 많이 놓게 하였다. 하지만 이해 [[음력 11월]]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잡아가면서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도 모두 끝이 난다. 이때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끌고 가는데, 충혜왕이 예복만 입은 것을 슬퍼한 은천옹주는 고용보에게 간청하여 충혜왕에게 [[갖옷]]<ref>구의(裘衣)라고도 하며,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을 말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576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갖옷〉항목] 참고</ref>을 바쳤다. 은천옹주는 충혜왕이 끌려간 후 충혜왕의 다른 궁인들 120여 명과 함께 곧바로 궁에서 추방되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a004&gunchaId=av025&muncheId=03&finId=013&NodeId=&setid=1903212&Pos=1&TotalCount=4&searchUrl=ok 《고려사절요》권25 - 충혜왕]</ref>.
 
=== 사망과 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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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서 추방당한 후의 은천옹주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생몰년 및 능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호 (이름)|호]]는 '''은천옹주'''(銀川翁主)이다.
 
은천옹주는 남편 [[고려 충혜왕|충혜왕]]과의충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왕석기|석기]](釋器)이고를 낳았는데, 왕석기는 특별히 받은 봉작은 없다. 석기는왕석기는 충혜왕이 [[원나라]]로원나라로 끌려간 후 [[1351년]](공민왕 즉위년) [[음력 12월]] [[고려 공민왕|공민왕]]에 의해 현재의 [[부산광역시]]에 있던<ref>{{뉴스 인용
| 제목 = <화제> 부산 萬德寺址 복원 목소리 높아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87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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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1994-11-25
| 확인날짜 = 2012-06-10
}}</ref> [[만덕사]](萬德寺)에 유폐되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a004&gunchaId=av026&muncheId=01&finId=004&NodeId=&setid=1915781&Pos=0&TotalCount=11&searchUrl=ok 《고려사절요》권26 - 충정왕]</ref>. 이후 공민왕은 석기를 원나라에서 석기를 데려갈까봐 만덕사에서 데려왔는데<ref name="jeju">[http://jeju.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701107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석기〉항목]</ref>, [[1356년]](공민왕 5년)에 일부에서 석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린다는 역모가 고해져 관련 인물들이 참형을 당하고<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a004&gunchaId=av026&muncheId=02&finId=010&NodeId=&setid=1915781&Pos=1&TotalCount=11&searchUrl=ok 《고려사절요》권26 - 공민왕1]</ref> 석기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ref name="jeju"/>. 당시 석기는 수정사라는 절에 숨었던 적이 있었으며, 제주도를 탈출하여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다가 백언린(白彦麟)이라는백언린이라는 이의 집에 숨어들었고, 민간의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ref name="dong">[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1096 《동국통감》권50 고려기 1375년]</ref>.
 
[[1373년]](공민왕 22년) [[음력 12월]]에는12월에는 평양윤(平壤尹)으로평양윤으로 있던 [[전녹생]](田祿生)이 석기를 사칭하고 다니는 자를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개경]]으로 보내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a004&gunchaId=av029&muncheId=01&finId=004&NodeId=&setid=1915781&Pos=2&TotalCount=11&searchUrl=ok 《고려사절요》권29 - 공민왕4]</ref>. 이후 석기는 [[1375년]](우왕 원년) [[음력 5월]] 처형되었고<ref name="dong"/>, [[1382년]](우왕 8년) [[음력 4월]] 석기의 아들도 살해당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1103 《동국통감》권51 고려기 1382년]</ref>.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임신 (고려 후기)|임신]] (林信, ? ~ [[1373년]]1373<ref name="limsin"/>)
** 남편 : 제28대 [[고려 충혜왕|충혜왕]] (忠惠王, [[1315년]] 1315~ [[1344년]]1344, 재위 : [[1330년]] 1330~ [[1332년]]1332, [[1339년]] 1339~ [[1344년]]1344) - [[고려]]의 제28대 [[왕]]
*** 아들 : [[왕석기]] (釋器, [[1341년]] 1341~ [[1375년]]1375)
 
== 출처 및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