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 대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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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612년]] 1월(음력) 제2차 여수 전쟁이 발발하여 [[수 양제]]는 1,133,800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요동성]]과 여러 성으로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러 달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고 피해가 누적되자 6월(음력)에 [[수군]](水軍)과 [[육군]]으로 편성된 별동대를 조직하여 평양성을 단숨에 공격하려 하였다.
 
고대의 병력 수치는 기록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기에 해외 역사학자와 이기훈등의 국내 사학자들은 60만 이하로 추정 한다.
 
육군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 좌효위대장군(左驍衛―) 형원항(荊元恒), 우익위장군<ref>《삼국사기》에는 우익위대장군이라 하였으나 오기이다. 《수서》65권 열전 제30 설세웅, 《[[북사]]》76권 열전 제64 설세웅, 《자치통감》을 따른다.</ref> [[설세웅]], 우둔위장군 [[신세웅]], 우어위장군(右禦衛―) 장근(張瑾), 우무후장군(右武侯―) 조효재(趙孝才), [[탁군]][[태수]] 겸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 최홍승(崔弘昇), 검교우어위대장군<ref>《수서》63권 열전 제28 위현, 《북사》76권 열전 제64 위현. 한편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서는 검교우어위호분랑장(―虎賁郞將)이라고 하였다.</ref> [[위문승]]이, 수군(水軍)은 우효위대장군<ref>《삼국사기》에서는 좌익위대장군이라고 했고, 《수서》64권 열전 제29 내호아, 《북사》76권 열전 제64 내호아, 《자치통감》은 우익위대장군이라 하였으나 둘 다 우문술, 우중문과 관직이 겹친다. 《수서》24권 지 제19 식(食) 수, 《수서》70권 열전 제35 양현감, 《북사》79권 열전 제67 우문술에서는 비슷한 시기 우효위대장군이라 하였다.</ref> [[내호아]], 좌무위장군<ref>《수서》65권 열전 제30 주법상</ref> [[주법상]]이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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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을 다했노라
*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그만 두는두기를 것이 어떠한가바라노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