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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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Writing_of_saun_yang.jpg‎|200px|thumb|right|양사언의 필적]]
'''양사언'''(楊士彦, [[1517년]] ~ [[1584년]]) [[조선]]의 문신·서예가로,서예가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용(海容)이며,. 본관은 [[청주 양씨|청주]](淸州)이다. [[안평대군]], [[김구 (1488년)|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초서체 제일이었다 한다.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1488년)|金絿]],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초서체(草書體) 분야의 제일이었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 대동승(大同升)을 거쳐 삼등(三登) 현감·평양 군수·강릉 부사·함흥 부윤 등을 역임한 후 회양(淮陽) 군수, 이어서 철원 군수를 지냈다.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들어가 대자연을 즐겼고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는 지금도 그가 새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이어서 안변(安邊) 군수로 나가 일을 잘하여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關係)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