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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신라]]시대에 [[당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친 이후 [[고려]] 시대의 [[송나라]],원나라와의 [[원나라]]와의 관계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쳤으며, 속국을 자처하였다. 이를 사대정책이라사대 정책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명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을 건립하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을 건립하였다. '영은'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모화'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명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소중화사상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인한 [[청나라]]에 대한 반감에 더하여, 예전부터 [[발해]]와 [[고려]], 조선을 형님의 나라이며 상국으로 받들던 [[여진족]]에 대한 멸시 등이 복합되어 반청 감정은 고조되었고, 북벌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반감은 19세기까지 이어졌고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