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 가이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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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막부말기의 정치 활동</big>'''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사절단을 이끌고 배의 선장으로 태평양을 횡단해 미국에 다녀오는데 성공한 공으로, 1862년에 해군 요직인 [[군함봉행]](軍艦奉行)이 되었다. 고베를 '일본의 해외 무역 거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오사카 만으로 안내하여 해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를 설득하였고, 고베에 해군조련소를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
가이슈는 해군조련소에서 사상가들을 모아 교육하였는데, 해군조련소를 막부의 독점물로 삼지 않고 서남지역 번의 자제들이나 막부 말기의 낭인들에게도 개방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해군의 시작이었지만 후에 문제가 되어 1864년 관직에서 해임되고, 약 1년 반 정도 에도의 아카사카에서 칩거하였다.
1866년에 군함봉행에 복직하였고 곧 왕정복고 쿠데타가 일어나며서 막부는 그에게는 협상의 실권을 넘겼다. 그가 맡은 자리는 육군 총재였는데 그는 주전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피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1869년 신정부군이 막부 타도를 내걸고 에도를 총공격하기로 한 3월 15일에 앞서 3월 13일, 14일 이틀동안 가쓰 가이슈는 신정부 측 사이고 다카모리와 의 협상으로 총공격이 중지되었다. 당시 에도의 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고 막부의 저항군 병력도 만만치 않았던 점을 고려할 때, 만약 전투가 일어났다면 대량의 인명 피해와 시설 파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쓰 가이슈의 정치적 판단과 결단은 막부의 몰락을 가져왔지만 일본에게 큰 다행으로 평가된다.<ref>”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2014, 박훈, 서울대 인문강의, 민음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