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12번째 줄:
 
=== 정치 활동 ===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조태채]], [[이이명]], [[이건명]]을 앞세워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을 것을 종용하였고, 경종이 이를 주저하자 조정백관 앞에서 경종은 효심과 군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니 서둘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는다는 교지를 내리고 정사에서 물러나라는 과격한 언사를 내뱉아 [[소론]]의 공분을 샀다. [[1721년]] [[신임옥사]]로 노론이 실각하자 성주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유배령에서 풀려나 예조, 공조의 판서와 지경연사, 빈객을 거쳐 우의정을 하다가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숙종실록]]》의 총재관이 되었다.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였고, 소론 영수 [[이광좌]]와의 화해를 주선했지면 역시 호응하지 않아 오히려 영조의 격노를 샀다. 그는 영조를 추대하려 노력하다가 죽어간 노론 대신들의 공적을 인정할 것과 신임사화 당시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복권과 소론 5대신에 대한 탄핵, 추탈, 부관참시 등을 요구하였다. 당색이 지나치고 언행이 과격하여 [[1727년]] [[정미환국]] 때 파직되어 순안에 안치되었다.
 
=== 생애 후반 ===
[[정미환국]]으로 발언권을 얻게 된 소론은 민진원이 완성한 《[[숙종실록]]》이 당의(黨意)<ref>민진원의 당파인 노론을 뜻한다. 실제로 숙종실록엔 노론은 온백성이 칭송을 금치 않은 만고의 충신으로, 소론은 무식하고 간사하며 반역당인 [[남인]]과 악녀 [[희빈 장씨]] 모자에게 아첨하는 간신의 무리로, 남인은 반역의 무리로 묘사되어 있다.</ref>와 사의(私意)<ref>인현왕후가 포함된 민진원의 일족에 대한 평가와 인현왕후의 정적이었던 [[희빈 장씨]]에 대한 평가가 실린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기사를 뜻한다.</ref>에 따라 고의로 기사를 누락하거나 왜곡시킨 부분이 많아 전면 개정이 불가피하다 주장하였지만 집권당인 노론의 반대에 부딪힌 탓에 일부 내용만 보정한 《숙종실록보궐정오》가 만들어졌다.<ref>영조실록 13권, 3년(1727 정미 / 청 옹정(雍正) 5년) 9월 18일(신미) 2번째기사 </ref> 다음해인 [[1728년]] 음력 3월, 소론 강경세력이 지방에 은신 중인 남인을 규합하여 삼남지역에서 대규모의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ref>영조실록 16권, 4년(1728 무신 / 청 옹정(雍正) 6년) 3월 15일(을축) 6번째기사 </ref> 이 사건으로 소론에게 강한 불신감을 갖게 된 영조는 노론 강경세력의 영수로 활동해온 민진원을 성모(聖母: 왕의 법모를 말한다. [[인현왕후]]를 뜻함)의 혈족이라는 이유를 붙여 다시 조정에 불러들였으며, 민진원은 토역을 청하여<ref>영조 24권, 5년(1729 기유 / 청 옹정(雍正) 7년) 12월 7일(정미) 3번째기사 </ref> 숙적인 소론과 남인에게 이인좌의 잔당이라는 죄목을 붙여 대거 숙청한다. 1729년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찬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에 들었다가 1736년 11월 28일 사망하였다.<ref>[[영조실록]] 42권, 12년(1736 병진 / 청 건륭(乾隆) 1년) 11월 28일(정사) 1번째기사 </ref>
 
저서에 《단암주의(丹巖奏議)》 《연행록(燕行錄)》 《민문충공주의(閔文忠公奏議)》 등이 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고 한다. 사후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