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 쇼지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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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기와 막부 말기 ===
* [[1858년]](안세이 5년) [[안세이 대옥]]이 있었던 즈음에 도사 번 참정 [[요시다 토요]]의 추천으로 하타 군 부교(幡多郡奉行)에 올랐다.</br>
* [[1860년]](만엔 원년) [[오사카]] 주재 도사 번저 건축 총책임을 맡아 후신부교(건축책임자,普請奉行)에 전임됐다.</br>
* [[1861년]](분큐 원년) 킨슈메츠케(행정 감사역, 御近習目付)에 올라 번정 개혁을 보좌했다.</br>
* [[1862년]](분큐 2년) 고모부이자 양아버지였던 [[요시다 도요]]가 세 자객의 손에 비명횡사했다. 범인 색출을 위해 온갖 수를 다 썼으나 실패했고, 곧 일어난 [[도사근왕당]] 등 [[존왕양이]] 파의 쿠데타로 그 역시 실각했다.</br>
* [[1863년]](분큐 3년) 에도 유학길에 올라, 카이세이쇼(開成所)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에게 영어를, 아이즈 번사 다카하시 킨베에(高橋金兵衛)에게 항해술을 배웠다.</br>
* [[1864년]](겐지 원년) 약 1년에 걸친 유학 끝에 번정에 복귀했다. 당시 겉으로는 은거 상태였지만 막후에서 번정을 움직이던 전 영주 [[야마우치 요도]] 공의 신뢰를 얻어 다이간사츠(감찰 총책임, 大監察), 이어 참정에 올랐고 [[공무합체]] 파로서 임무를 다했다.</br>
* [[1865년]](게이오 원년) 음력 윤 5월 11일, [[다케치 즈이잔]]을 체포해 구금하고 [[도사근왕당]]을 일망타진했다. 이후 [[다케치 즈이잔]]은 영주의 명으로 할복, 그 외 히라이 슈지로, 오카다 이조 등 당원들이 차례차례 처형됐다.</br>
* [[1866년]](게이오 2년) 도사 번 참정으로서 [[도사상회]]를 설립하고 [[사쓰마 번]]과 [[나가사키]]를 연결해 무역 운송업에 나섰다. 후일 [[미쓰비시 그룹]] 총수가 되는 [[이와사키 야타로]]를 발탁해 나가사키 지점장으로 고용했으며, 이후 [[사카모토 료마]]의 [[가이엔타이]](海援隊)를 거느리고 증기선 운송에 나서기도 했다. 이 때 [[사카모토 료마]]의 주선으로 [[사쓰마 번]], [[조슈 번]]과 회담을 가지기도 하고 ([[이케다야 사건]]에서 [[신센구미]]에게 패전당한 낭인들을 포함하는) 존왕양이 파 탈번 낭인들을 포섭해 도사 번이 [[메이지 유신]]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노력했다.</br>
* [[1867년]](게이오 3년) 왕정복고 및 서양식 의회 설치 등 정치적 개혁안 등을 담은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을 고토 쇼지로 자신의 서명으로 [[야마우치 요도]]에게 올려 [[대정봉환]]의 밑그림을 완성했다. 도사 번의 교토 주재 간부들인 [[데라무라 미치나리]](寺村道成), [[마나베 마사무네]](真辺正心), [[후쿠오카 다카치카]](福岡孝弟) 등의 찬성으로 사쓰마 번과 삿도맹약(薩土盟約)을 맺어 [[대정봉환]]을 결의했다. 그러나 [[이카루스 호 사건]]의 처리를 놓고 도사 번에 온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Harry Parkes)와의 교섭으로 시간을 지체해, 막부 타도가 전략적 목표인 [[사쓰마 번]]의 의심을 받아 맹약을 취소 당했다. 사쓰마와의 제휴가 물거품이 된 후에도 [[대정봉환]]에 대한 노력은 계속돼, 10월 13일 주군 [[야마우치 요도]]의 서명을 넣은 대정봉환 상소문(建白書)을 막부에 제출했다. 10월 14일에는 [[세이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慶喜)가 대정봉환을 전격 수용했으며 이에 대한 공으로 고토 쇼지로는 녹봉 7백석의 쥬로가쿠(中老格)에 올라 도합 1천 5백 석 녹봉을 자랑하게 됐다. </br>
* [[1868년]](메이지 원년)에는 [[해리 파크스|파크스]] 습격사건 진압의 공으로 [[나카이 히로시]](中井弘)와 함께 영국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명예의 보검을 증정받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자 영지 1천 석을 가증받았다.</br>
 
=== 메이지 유신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