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레토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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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레토 전투는 독일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본격적으로 원조한 최초의 전투였다. 카도르나의 이손초 강 유역 전선을 통한 돌파 정책의 고수는 많은 이탈리아군의 희생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는 경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선과 전쟁수행능력의 급격한 저하를 가져올 위험이 많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손초 강]] 유역의 [[고리지아]](Gorizia)의 함락이 임박한 상황([[11차 이손초 전투]]로 인해)에서 독일의 3번째 최고 사령관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오스트리아군 최고 사령관인 [[아르츠 폰 슈트라우스베르크]](Arz von Straussenberg)의 통합작전 제의를 받고 이를 수락한다.
카도르나는 독일군이 이손초 전선에 개입할 것을 늘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당시
지금까지도 왜 카도르나가 오스트리아-독일 연합공격에 대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처음에
비록 이손초 강의 수적 우위는 이탈리아 군이 점유하고 있었지만
[[1917년]] [[10월 24일]] 새벽 2시에 이루어진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는 새벽의 안개가 더욱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두 번째 공격에서는 이탈리아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첫 번째 공세보다는 적은 전진을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지역에서의 계속된 성공으로인해 이미 이탈리아군은 더 이상 카포레토 전선을 지킬 만한 힘이 없게 된다. 다시 한 번 이탈리아군은 붕괴되기 시작하고 카펠로는 그의 이탈리아군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아직 이탈리아군의 주력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4일이나 남았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10월 30일]]까지 거의
하지만 초반의 엄청난 피해에 겁을 먹은 이탈리아군 최고 사령부에서는 독일의 또 다른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계속 그 지역의 전군에 대해 후퇴를 명령하게 되고 아직 완벽한 보급라인이 구축되지 않은
이 전투에서의 대규모 후퇴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20만명여의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중 90%가 포로였다. 또한 많은 수의 포를 잃었고
카포레토 전투 전까지 이탈리아군은 단독으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여왔으나 독일군의 투입과 카포레토 전투의 대 재앙으로 인해 이 정책을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연합국은 프랑스군 6개사단과 영국군 5개사단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양국 비행편대와 보급지원 부대들을 이탈리아에 배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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