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레토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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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레토 전투는 독일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본격적으로 원조한 최초의 전투였다. 카도르나의 이손초 강 유역 전선을 통한 돌파 정책의 고수는 많은 이탈리아군의 희생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는 경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선과 전쟁수행능력의 급격한 저하를 가져올 위험이 많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손초 강]] 유역의 [[고리지아]](Gorizia)의 함락이 임박한 상황([[11차 이손초 전투]]로 인해)에서 독일의 3번째 최고 사령관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오스트리아군 최고 사령관인 [[아르츠 폰 슈트라우스베르크]](Arz von Straussenberg)의 통합작전 제의를 받고 이를 수락한다.
 
카도르나는 독일군이 이손초 전선에 개입할 것을 늘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당시 오스트리아측의오스트리아 측의 탈영병들과 공중 정찰을 통해 독일군의 활동을 보고 받게 된다. 이를 보고 받은 카도르나는 방어를 강화할 생각보다는 공세를 위한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다.
 
지금까지도 왜 카도르나가 오스트리아-독일 연합공격에 대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처음에 오스트리아측의오스트리아 측의 최고 사령부는 1916년 [[트렌티노 공세]] 때와 같은 전 전선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주장했으나 독일측은독일 측은 이를 무시하고 주의깊게 주요 공격포인트를 설정한다. 그렇게 설정된 곳이 이손초 강 유역의 고리지아 북쪽에 위치한 25km정도25km 정도 구역의 카포레토 전선이었다. 1917년 10월, 9개의 오스트리아군 사단이 6개의 독일사단과독일 사단과 함께 전투를 준비한다. 독일측의독일 측의 최고사령관은 [[오스카르 폰 후티어]]였고 이들은 뷜로우 장군이 지휘하는 재14야전군으로 배치된다.
 
비록 이손초 강의 수적 우위는 이탈리아 군이 점유하고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측이오스트리아 35개사단이었고측이 이탈리아군은35개 사단이었고 이탈리아 측은 41개 사단이었다) 집중적으로 작전이 이루어질 카포레토(현재의 [[슬로베니아]] [[코바리드]]) 지역에서의 이탈리아군은 그리 강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카포레토 지역의 이탈리아군 사령관 카펠로(Capello) 장군은 방어라인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는 상부의 공격명령을 대비하기보다는 방어를 강화한뒤 남쪽으로 우회해 공격할 작전을 가지고 있었다.
 
[[1917년]] [[10월 24일]] 새벽 2시에 이루어진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는 새벽의 안개가 더욱 동맹국측에동맹국 측에 더 유리하게 만들어 완전한 동맹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최초의 공세는 동맹국측의동맹국 측의 중포를 동원한 엄청난 포격과 [[독가스]], [[연막탄]]에 독일, 오스트리아군의 효율적인 통합작전으로 순식간에 이탈리아 제2군의 참호선을 무력화 시키게 된다. 첫날에만첫 날에만 약 25km의 진격이라는 놀라운 전과를 올리는데 이는 특수부대의 잠입작전을 이용해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이용한 새로운 전술의 등장으로 이탈리아군을 더욱 힘들게 만들게 된다.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두 번째 공격에서는 이탈리아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첫 번째 공세보다는 적은 전진을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지역에서의 계속된 성공으로인해 이미 이탈리아군은 더 이상 카포레토 전선을 지킬 만한 힘이 없게 된다. 다시 한 번 이탈리아군은 붕괴되기 시작하고 카펠로는 그의 이탈리아군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아직 이탈리아군의 주력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4일이나 남았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10월 30일]]까지 거의 1주일간에1주일 간에 걸쳐 후퇴를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초반의 엄청난 피해에 겁을 먹은 이탈리아군 최고 사령부에서는 독일의 또 다른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계속 그 지역의 전군에 대해 후퇴를 명령하게 되고 아직 완벽한 보급라인이 구축되지 않은 동맹국측으로서는동맹국 측으로서는 거의 피해없이 진격을 계속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11월 10일]]까지 후퇴를 계속해 [[베니스베네치아]]로부터 겨우 30km떨어진 [[피아베 강|피아베(Piave)강]]까지 후퇴해 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게 된다. 오히려 이탈리아군의 너무 빠른 후퇴로 인해 전진속도를 맞추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 전투에서의 대규모 후퇴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20만명여의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중 90%가 포로였다. 또한 많은 수의 포를 잃었고 연합국측에서는연합국 측에서는 상당히 놀라게 된다. 따라서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이자 수상이었던 카도르나는 해임되고 [[아르만도 디아츠]](Armando Diaz)장군이 새로운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또한 수상에는 [[비또리오 올랜도]](Vittorio Orlando)가 임명된다. 전쟁장관에는전쟁 장관에는 보셀리(Boselli)가 임명되어 연합국측으로부터연합국 측으로부터 즉각적이고 강화된 지원을 약속받게 된다.
 
카포레토 전투 전까지 이탈리아군은 단독으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여왔으나 독일군의 투입과 카포레토 전투의 대 재앙으로 인해 이 정책을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연합국은 프랑스군 6개사단과 영국군 5개사단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양국 비행편대와 보급지원 부대들을 이탈리아에 배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