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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년 우산기상시 1398년 정사공신 1400년 좌명공신 문하좌정승 1402년 영의정부사 기로회 창설 영사평부사 1404년 사병혁파 반대로 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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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이'''(李居易, [[1348년]] ~ [[1412년]])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이다. 본관은 [[청주 이씨|청주]](淸州)이고 [[자 (이름)|자(字)]]는 낙천(樂天)이며 [[호 (이름)|호]]는 청허자(淸虛子)이다. [[작위]]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다. 시호는 문도공이다.
 
== 생애 ==
고려 말 이성계의 추천으로 강계 관군 만호가 되었다. 개국원종공신.
[[고려]] 말기이던 [[1387년]]에 음서로 천거되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지냈으며 [[1392년]]에 사돈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창건하자 다시 중용되어 관직이 [[영의정|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1398년]]에는 아들인 [[이애 (1363년)|상당부원군 이애]]와 함께 [[제1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공신에 책봉된다.
 
1393년(태조2년) 우산기상시가 되었고, 1398년(태조7년) 평안도병마절제사로 왜구를 격퇴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이 되었고, 곧 이어서 참찬문하부사 겸 의흥삼군부중군동지절제사가 되었다.
 
1400년(정종2년) 제2차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이 되었다. 곧 이어 사병혁파가 추진될 때 이를 반대하여 계림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판문하부사로 복귀하였다. 태종 즉위 후 관제 개편으로 문하 죄정승이 되었다.
 
1402년(태종2년)영의정부사가 되었다. 그는 70세 이상의 노재상의 친목 모임인 기로회를 설립하였다. 다시 영사평부사가 되었다.
 
1404년(태종4년)사병 혁파 반대한 죄로 탄핵을 받아 진천으로 낙향하였다. 이는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외척 제거의 신호탄이라 하겠다. 1412년(태종12년) 8월 25일 진천에서 졸하였다.
 
그는 [[조선 태조|태조]]의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의 [[남편]]인 [[이애 (1363년)|상당부원군 이애]](上黨府院君 李薆), [[조선 태종|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의 남편인 [[이백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