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당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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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이하의 조상은 [[당 고조|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숙부였던 대정효왕(大鄭孝王) 이량(李亮)이었다. 이량의 장남인 회안정왕(淮安靖王) 수(壽, 자는 신통神通)의 열한 번째 아들인 오국공(呉國公)・익주대도독(益州大都督) 이효일(李孝逸)의 3대 손이 진숙(
이하는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여, 14세에 여러 편의 악부(
== 인물 · 일화 ==
*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이하소전(李賀小傳)》을 지은 [[이상은]](李商
* 한유와 마찬가지로 문단의 대가로서 재상을 맡고 있던 원진(元稹)과도 알력이 있었다는 것을 전하는 일화도 있지만 연대가 맞지 않는다.
* 《이하소전》은 또, 어느 날 낮에 천상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이하의 앞에 나타났는데, 태고전(太古篆) 같은 서체의 한 판서(版書)를 가지고 이하를 부르자 이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모친이 늙고 또 병들어서 하는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阿彌老且病 賀不願去)."라고 하자 그 사람은 웃으면서 "상제께서 백옥루를 낙성하셔서 지금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 하려는 것이다. 천상이 더 즐거우니 고통스럽지 않으리라(帝成白玉樓 立召君爲記 天上差樂 不苦也)"라고 대답했고, 이하는 웃으며 따라갔다. 그날이 이하가 숨을 거둔 날이었다는 것이다(이후 '백옥루'는 문인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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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전에는 일단 '괴이한 것'에 대한 동경이 깊었던 한유가 그의 문학에 대한 이해자이자 강력한 비호자였다. 만당 시대에 이르면 이하의 동족으로 유미적 경향을 추구한 이상은과, 대조적으로 혁명적 사회파였던 피일휴(皮日休)가 이하의 시에 심취하였다. [[남송]](南宋) 말기에서 [[원나라|원]](元) 초기의 한족 민족주의자들도 이하의 시를 아꼈는데, 특히 사호(謝翺)의 시에서 그 영향이 현저히 드러난다.
[[청나라|청]](淸)에 이르면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서 비평가 심덕잠(沈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이하의 『장진주』의 마지막 구절 "술은 유령(劉伶)의 무덤 위에 이를 수 없으리니"에 착안해 『속장진주』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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