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당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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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이하의 조상은 [[당 고조|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숙부였던 대정효왕(大鄭孝王) 이량(李亮)이었다. 이량의 장남인 회안정왕(淮安靖王) 수(壽, 자는 신통神通)의 열한 번째 아들인 오국공(呉國公)・익주대도독(益州大都督) 이효일(李孝逸)의 3대 손이 진숙(晋粛晉肅)으로 이하의 아버지이다. 아버지 진숙은 [[두보]](杜甫)의 친족으로 섬현령(陝令) 등 지방관을 맡은 중견 관리로, 섬현은 당의 수도였던 [[낙양]]과 [[장안]]을 잇는 길 위에 위치한 요지로서 황실 친족으로만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이하는 자신의 계보에 몹시 자부심을 가졌고 자신의 출신지가 당 황실과 같은 농서(朧西) 성기(成紀, 지금의 중국 간쑤 성 천수 시天水市)라며 뽐내고 다녔지만, 정작 이하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집안은 중산층 정도로 몰락해 있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로 다른 왕족에게 시집간 누나와 남동생 유(猶)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하는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여, 14세에 여러 편의 악부(府)를 지어 이름을 떨쳤으며, 17세 때 당시 문단의 지도자적인 존재였던 [[한유]](韓愈)로부터 격찬받아 그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810년에 진사(進士)가 되고자 장안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아버지의 휘였던 「진()」과 진사의 「진(進)」이 같은 발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시험을 거부당한다(스승 한유가 나서서 『휘를 변명하다』라는 글을 지어 반박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때의 지식인들에게는 진사로 나아가 과거 시험을 거쳐 관료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고, 그 길이 막혀버린 이하는 실의에 빠져 장안을 떠나 창곡(昌谷)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종9품상 봉례랑(奉郎) 관직을 얻어 다시 장안으로 오게 되지만(봉례랑 직책도 황실 혈연자에게 주는 것이 통례였다), 제례 때에 석차를 맡아보는 말석에 불과했던 봉례랑 직책이 성에 차지 못했던 이하는 813년 봄에 「봉례는 관직도 낮으니 더 무엇이 있는가」라는 시를 남기고 관직을 사임한 채 귀향해버렸다. 이듬해 따로 관직을 구하고자 친구 장철(張徹)을 의지해 노주(潞州, 지금의 산서 성山西省 장치 현長治)으로 향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창곡으로 돌아와, 817년 갑작스레 병을 얻어 어머니 곁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27세였다.
 
== 인물 · 일화 ==
*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이하소전(李賀小傳)》을 지은 [[이상은]](李商)은 이하의 용모에 대해 「체구가 말랐고, 가늘고 짙은 눈썹이 좌우로 이어졌으며 손톱이 이상하게 길었다」고 묘사하였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종종 타인으로부터 공격받고, 배척당했다(과거를 보지 못한 것도 이 성격이 원인이었다).
* 한유와 마찬가지로 문단의 대가로서 재상을 맡고 있던 원진(元稹)과도 알력이 있었다는 것을 전하는 일화도 있지만 연대가 맞지 않는다.
* 《이하소전》은 또, 어느 날 낮에 천상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이하의 앞에 나타났는데, 태고전(太古篆) 같은 서체의 한 판서(版書)를 가지고 이하를 부르자 이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모친이 늙고 또 병들어서 하는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阿彌老且病 賀不願去)."라고 하자 그 사람은 웃으면서 "상제께서 백옥루를 낙성하셔서 지금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 하려는 것이다. 천상이 더 즐거우니 고통스럽지 않으리라(帝成白玉樓 立召君爲記 天上差樂 不苦也)"라고 대답했고, 이하는 웃으며 따라갔다. 그날이 이하가 숨을 거둔 날이었다는 것이다(이후 '백옥루'는 문인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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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전에는 일단 '괴이한 것'에 대한 동경이 깊었던 한유가 그의 문학에 대한 이해자이자 강력한 비호자였다. 만당 시대에 이르면 이하의 동족으로 유미적 경향을 추구한 이상은과, 대조적으로 혁명적 사회파였던 피일휴(皮日休)가 이하의 시에 심취하였다. [[남송]](南宋) 말기에서 [[원나라|원]](元) 초기의 한족 민족주의자들도 이하의 시를 아꼈는데, 특히 사호(謝翺)의 시에서 그 영향이 현저히 드러난다.
 
[[청나라|청]](淸)에 이르면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서 비평가 심덕잠(沈徳潜德潛)은 이하의 시를 두고 「천지간에 이런 문필은 없을 것이다」라고까지 했다. 근대에는 청말의 혁명가 담사동(嗣同),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迅),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毛沢東泽东)이 이하의 시를 애독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이하의 『장진주』의 마지막 구절 "술은 유령(劉伶)의 무덤 위에 이를 수 없으리니"에 착안해 『속장진주』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