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HotCat을 사용해서 분류:서울특별시의 사적 삭제함
잔글편집 요약 없음
15번째 줄:
 
== 이름 유래 ==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ref>{{뉴스 인용 |제목=한양도성 창의문~혜화문 |url=http://www.outdoor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63 |출판사=outdoor |저자=김효진 |날짜=2004-06-19 |확인일자=2014-12-01 }}</ref>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url=http://www.outdoor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63
|제목=한양도성 창의문~혜화문
|출판사=outdoor
|저자=김효진
|날짜=2004-06-19
|확인일자=2014-12-01
}}</ref>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 역사 ==
[[1396년]]([[조선 태조|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ref>《태조실록》 10권 5년 9월 24일,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9024_002 국사편찬위원회], [[:s:태조강헌대왕실록/5년#9월24일 2번째 기사|위키문헌]]</ref> [[1413년]]([[조선 태종|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ref>《태종실록》 25권 13년 6월 19일, 서전문(西箭門)을 열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306019_002 국사편찬위원회]</ref>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ref>《연산군일기》 54권 10년 7월 ​25일, 숙청문을 막고 새 문을 만들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7025_006 국사편찬위원회]</ref>,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ref>{{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날짜=2010 |제목=순성의 즐거움》, |위치=경기 |출판사=효형출판, 2010, p165, ISBN|쪽=165 |isbn=9788958720966 }}</ref>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ref>[{{뉴스 인용 |제목=자하문 26년만에 일반공개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0200209127007&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9-02&officeId=00020&pageNo=27&printNo=22275&publishType=00010 자하문|뉴스=동아일보 26년만에 일반공개], 《동아일보》,|저자=반병희 |날짜=1993.-09.-02. |확인날짜=2015-11-22 }}</ref>,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서울이 품 안 가득’ 미리 가 본 북악산 홍련사∼창의문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0018861 ’서울이|뉴스=쿠키뉴스 품 안 가득’ 미리 가 본 북악산 홍련사∼창의문], 《쿠키뉴스》,|저자=윤중식 |날짜=2006.-03.-19. |확인날짜=2015-11-22 }}</ref>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ref>[{{뉴스 인용 |제목=삼청지구성곽·숙정문복원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10210020920702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10-21&officeId=00020&pageNo=7&printNo=16939&publishType=00020 삼청지구성곽·숙정문복원], 《|뉴스=동아일보》, |날짜=1976.-10.-21. |확인날짜=2015-11-22 }}</ref>,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