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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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조선 고종|고종]] 44년) [[6월]]에는 [[이완용]] 등의 주장에 의하여 도성을 철거하기로 정하였고<ref>《고종실록》 48권 44년 6월 22일, 이완용 등이 나머지 성벽을 헐어버릴 것을 아뢰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6022_004 국사편찬위원회]</ref>, 이를 위하여 같은 해 [[7월 30일]]에 성벽처리위원회를 마련하였다.<ref>《순종실록》 1권 즉위년 7월 30일, 성벽 처리 위원회에 대한 것을 공포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7030_001 국사편찬위원회]</ref> 1907년 [[9월]]부터 숭례문의 북쪽 성벽을 철거하고 남지를 매립하였으며, [[1908년]] [[3월]]에는 흥인지문의 좌우 성벽을 헐었다.<ref name="순성즐223224">{{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날짜=2010 |제목=순성의 즐거움 |위치=경기 |출판사=효형출판 |쪽=223-224 |isbn=9788958720966 }}</ref> 이는 [[서울 전차|전차]] 선로의 부설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 1908년 9월에는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총 77간을 파괴하였다.<ref name="순성즐225">{{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날짜=2010 |제목=순성의 즐거움 |위치=경기 |출판사=효형출판 |쪽=225 |isbn=9788958720966 }}</ref>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 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파괴되었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서대문과 동대문의 일부를 헐어내었고, 광화문과 용산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숭례문 부근을 역시 헐어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산성을 제외한 평지에 있던 성곽은 모두 헐리어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6.25전쟁 때에도 평지의 도성이 남이 있었다는 사진이 등장하였다.{{출처|날짜=2015-11-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국방 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에 따라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1975년 광희문 문루 복원을 시작으로 훼손된 체성과 여장 복원, 주변 가옥 매입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 복원에 이어 2012년 9월까지 진행된 인왕산 정상 구간까지 총 길이 18,627m 중 69%인 12,771m의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구간 성벽 복원까지 마무리되었으며, 앞으로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ref>서울특별시(2013) 서울 한양도성 시민순성관 현장순성 자료집 2013.4.20</ref>
==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
2012년 11월 23일, 서울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세계현존수도 중 최장기간인 514년(1396~1910) 동안 도성 역할을 수행하였고,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자연친화적으로 축조된 점 등이 세계유산적 가치로 평가받았다. 잠정목록에 오르면 1년 뒤부터 세계유산 등재신청 자격이 부여된다.<ref>
한양도성은 UNESCO 등재기준의 다음 항목에 부합한다.<ref>이하 내용은, 송인호(2013) ‘서울 한양도성의 진정성과 완전성’ 발제문 부분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이는 서울특별시 한양도성도감에서 발간한 ‘서울 한양도성의 역사와 가치’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 서울시립대학교 송인호 교수는 서울학연구소 소장 겸 [[국제 기념물 유적 협의회|이코모스]](ICOMOS) 코리아 사무총장을 지내고 있으며, 이코모스는 유네스코 공식자문기구로서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심의 및 연구를 보조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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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악구간 ===
창의문부터 와룡공원까지는 1968년 [[1.21 사태]]가 일어나며 [[청와대]]의 보안을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1993년에는 창의문이 개방되었다.<ref>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2570m 구간 가운데 일부를 삼청지구로 지정하여 1975년 9월 18일부터 1976년 10월 21일까지 성곽 1994m와 여장 1403m를 해체·복원하였고, 숙정문에서 혜화문까지 1429m의 성곽을 성북지구로 지정하여 1976년 10월 4일부터 1978년 3월 20일까지 보수함과 동시에 일대 건물을 정비하였다.<ref name="서울성곽283">{{서적 인용 |저자=나각순 |날짜=2004 |제목=서울의 성곽 |위치=서울 |출판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쪽=283 }}</ref> [[경신중학교|경신중]]·[[경신고등학교|고등학교]] 동쪽 담장의 150m 가량은 그 아랫부분이 성곽이다.<ref>
=== 낙산구간 ===
2008년 말 경에는 삼선동 일대의 성곽 외벽을 따라 탐방로가 조성되었다.<ref>
1979년 6월 1일부터 1980년 8월 12일까지 혜화문부터 낙산 정상까지 성곽 1037m와 여장 1033m를 삼선지구로 정하여 복원하였다.<ref name="서울성곽283"/> 또 낙산 정상에서부터 흥인지문까지 성곽·여장 1051m를 동숭지구로 지정하여, 1980년 9월 30일부터 이듬해 8월 1일까지 543m의 성곽을 보수하였고, 1981년 9월 19일부터 이듬해 6월 16일까지 잔여 구간인 성곽 508m와 여장 520.5m를 복원하며 2개의 암문을 개설하였다.<ref name="서울성곽284">{{서적 인용 |저자=나각순 |날짜=2004 |제목=서울의 성곽 |위치=서울 |출판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쪽=284 }}</ref>
=== 흥인지문구간 ===
오간수문은 기단부가 발굴되었으나 복원되지 않았고, 축소 모형이 오간수교 옆에 만들어져 있다.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짓기 위한 발굴 조사 중에 멸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간수문과 일대 성곽이 드러났다.<ref>
1752년 11월 [[어영청]]의 [[홍봉한]]이 [[청계천]]을 파내고 [[치성]]을 축조하자고 건의하였다.<ref>《영조실록》 영조 78권 28년 11월 28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811028_001&tabid=k 어영 대장 홍봉한이 도성 안의 개천을 파고 성을 축조해야 한다고 청하다]</ref> 다음달에는 [[우의정]] [[김상로]]의 주장에 따라 흥인문과 광희문 사이에 치성 5개를 쌓기로 정하였다.<ref>《영조실록》 영조 78권 28년 12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812003_001&tabid=k 대신들과 성을 축조하는 일을 의논하다]</ref> 이듬해 5월 24일에는 치성 축조를 끝마쳐 홍봉한에게 상을 내렸다.<ref>《영조실록》 영조 79권 29년 5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905024_001&tabid=k 좌의정 이천보 등이 친히 비를 빌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ref> 그런데 실제 광희문 북쪽에 위치한 치성은 4개였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순성즐243">{{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날짜=2010 |제목=순성의 즐거움 |위치=경기 |출판사=효형출판 |쪽=243 |isbn=9788958720966 }}</ref> 흥인지문 남쪽과 청계천 사이에 1개, 청계천과 DDP 사이에 1개, DDP 안에 1개, 한양공고 자리에 1개가 있었고, 광희문 남쪽에도 1개가 있었다.<ref name="순성즐244">{{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날짜=2010 |제목=순성의 즐거움 |위치=경기 |출판사=효형출판 |쪽=244 |isbn=9788958720966 }}</ref> 이 가운데 청계천 북쪽에 있던 치성은 1907년 오간수문을 헐며 같이 철거되었다.<ref name="순성즐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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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 || 師火帝鳥官人皇始制文字乃服</br>衣裳推位讓國有虞陶唐 || 弔 || 돈의문 부근 || 북악산 북서쪽 || 황해도
|}
숙종 때와 그 이후에도 성곽의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이때에는 성곽 보수 담당자의 이름을 중심으로 각자성석이 새겨졌다.
=== 현황 ===
[[파일:KOCIS Korea Seoul Fortress 20130924 19 (9910949355).jpg|섬네일|오른쪽|흥인지문 앞 각자성석 (2013년)]]
백악구간에는 순조 때의 각자성석이 눈에 띈다. 북악산 청운대(靑雲臺, 293m)를 지나는 성곽의 여장에는 ‘가경구년<ref group="주">가경 9년은 순조 4년(1804년)이다.</ref> 갑자 십월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변수 권성휘(嘉慶九年 甲子 十月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權聖輝)’라고 새겨진 각자가 있다.<ref name="사라진136">{{서적 인용 |저자=강명관 |날짜=2009 |제목=사라진 서울 |위치=서울 |출판사=푸른역사 |쪽=136 |isbn=9788994079066 }}</ref><ref>{{서적 인용 |저자1=[[유홍준]] |저자2=박상진 |날짜=2007 |제목=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 서울성곽 |위치=대전 |출판사=문화재청 |쪽=16-17 |isbn=9788985764582 }}</ref>
남산구간에는 각자성석이 잘 드러나 있다. 장충체육관부터 반얀트리클럽까지 성곽 바깥쪽에서 보이는 각자를 북쪽부터 차례로 나열하면 해진시면(海珍始面), 함안시면(咸安始面), 생자육백척(生字六百尺), 의령시면(宜寧始面), 경산시면(慶山始面), 연일시면(延日始面), 흥해시면(興海始面), 순흥시면(順興始面), 하양시면(河陽始面), 기장시면(機張始面), 울산시면(蔚山始面), 수자육백척(水字六百尺), 예천시면(醴泉始面),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 성주시면(星州始面), 선산시면(善山始面)이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72-273, ISBN 9788958720966</ref> 성곽 돌로 쌓인 반얀트리클럽 본관 건물 후면 축대에는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 각자가<ref name="순성즐263264">{{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날짜=2010 |제목=순성의 즐거움 |위치=경기 |출판사=효형출판 |쪽=263-264 |isbn=9788958720966 }}</ref>, 자유센터 정문 안 축대에는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 각자가<ref name="순성즐270">{{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날짜=2010 |제목=순성의 즐거움 |위치=경기 |출판사=효형출판 |쪽=270 |isbn=9788958720966 }}</ref>, 자유센터 담장에는 경주시(慶州始) 각자가 있다.<ref name="순성즐271">{{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날짜=2010 |제목=순성의 즐거움 |위치=경기 |출판사=효형출판 |쪽=271 |isbn=9788958720966 }}</ref> 2014년 8월에는 남산 회현자락에서 내자육백척(柰字六百尺) 각자가 발굴되었다.<ref name="201408회현"/>▼
낙산구간에는 흥인지문 앞의 각자성석이 잘 알려져 있다. ‘훈국 책응겸독역장 십인 사 한필영 일패장 절충 성세각 이패장 절충 김수선 삼패장 사과 유제한 석수도변수 오유선 일패변수 양산호 이패변수 황승선 삼패변수 김정립 강희사십오년<ref group="주">강희 45년은 숙종 32년(1706년)이다.</ref>사월일개축(訓局 策應兼督役將 十人 使 韓弼榮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金守善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都邊首 吳有善 一牌邊首 梁山昊 二牌邊首 黃承善 三牌邊首 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日改築)’이라고 흥인지문과 마주본 면에 새겨져 있었다.<ref name="사라진133134">{{서적 인용 |저자=강명관 |날짜=2009 |제목=사라진 서울 |위치=서울 |출판사=푸른역사 |쪽=133-134 |isbn=9788994079066 }}</ref> 이것은 한양도성을 복원하며 성곽 동측면으로 이동하였다가, 2015년 흥인지문 북측 성곽을 복원하며 본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남산구간에는 각자성석이 잘 드러나 있다. 장충체육관부터 반얀트리클럽까지 성곽 바깥쪽에서 보이는 각자를 북쪽부터 차례로 나열하면 해진시면(海珍始面), 함안시면(咸安始面), 생자육백척(生字六百尺), 의령시면(宜寧始面), 경산시면(慶山始面), 연일시면(延日始面), 흥해시면(興海始面), 순흥시면(順興始面), 하양시면(河陽始面), 기장시면(機張始面), 울산시면(蔚山始面), 수자육백척(水字六百尺), 예천시면(醴泉始面),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 성주시면(星州始面), 선산시면(善山始面)이다.<ref name="순성즐272273">{{서적 인용 |저자=김도형
== 순성 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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