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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남만주, 동만주 일대는 '독립군'으로 칭해지던 민족주의 계열 항일 군사조직과 '빨치산'으로 칭해지던 사회주의 계열 항일 군사조직이 이념 차이로 인해 수시로 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서 적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전선론에 기반한 항일 운동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는데, 대표적으로 오성륜(吳成崙)·김일성(金日成)·엄수명(嚴洙明)·이상준(李相俊) 등이 이에 속했다. 이들은 인민전선론에 기반하여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하여 구적(寇敵)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10대 강령을 발표하여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창립했다.<ref>백동현 저, 『한인조국광복회'운동에 관한 연구』(1994년, 고려대학교 학위논문(석사)) pp. 11 ~ 35</ref>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류가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ref>백동현 저, 『한인조국광복회'운동에 관한 연구』(1994년, 고려대학교 학위논문(석사)) pp. 45 ~ 48</ref>
 
조국광복회의 파생 조직은 원산·함흥·길주·흥남·성진 등지까지 그 규모를 확대했으며, 그중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곳은 갑산(甲山)공작위원회였다. 갑산공작위원회는 [[1937년]]에 항일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되어 기관지 <화전민>을 발행하는 한편, 지하 조직 건설·군사시설 파괴·군사수송 방해 등 항일운동을 폈다.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무장부대와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도 했는데. [[1937년]] 당시에 [[김일성]]이 지휘했던 보천보전투와 동녕현성전투가 대표적이다. [[1938년]]에 들어선 739 명의 조국광복회원이 체포되어서 소규모 파생 조직이 괴멸하는 고비를 겪는 등,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내·만주·연해주 일대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했다.<ref>성주현 저, 『1930년대 천도교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관한 연구 - 갑산ㆍ삼수ㆍ풍산ㆍ장백현 지역의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2000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pp. 174 ~ 18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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