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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초 14년([[1609년]]) 사쓰마는 [[류큐]](琉球)를 쳐서 복속시키고([[류큐 침공]]) 류큐의 [[고쿠다카]](石高) 12만 석을 더 얻었으며, 류큐로부터 [[아마미 군도]](奄美群島)를 빼앗아 오시마(大島) · 기카이(喜界) · 도쿠노시마(徳之島) · 오키노에라부(沖永良部) 등 네 개의 대관(代官)을 배치하고 직접지배하고, 나하(那覇)에 류큐재번봉행(琉球在番奉行)를 보내 류큐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쓰마 번의 류큐 지배는 연공(年貢)보다는 류큐 왕국을 창구로 하는 대중국 교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으며, 아마미산 사탕은 번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 밖에 고쿠타카도 더 늘어나 기존의 56만 석에서 72만 석(77만 석까지도 늘어났다)이 되었다.
 
[[쓰시마 국|쓰시마]] [[쓰시마 후추 번|후추 번과번]](對馬府中藩)과 마찬가지로 옛 지배자가 갈리는 일 없이 그대로 유지된 사쓰마 번에는 에도 막부 수립 이전의 기존 지배 체제가 잔존했고, 외성제(外城制)<ref>무사를 가고시마 성(鹿児島城) 아래에 모여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지 안에 흩어져 있는 외성(外城)이라 불리는 거점에 거주하도록 하는 것. 외성은 [[덴메이]](天明) 4년([[1784년]])에 호칭을 사토(郷)로 바꾸었다.</ref>나 가도와리(門割)<ref>농민 몇 호씩을 가도(門)로 묶어서 가도마다 토지를 공동 소유하도록 하는 것.</ref> 등의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향사(郷士) 신분이 전체 인구의 약 40%를 점유했고<ref>임신호적(壬申戸籍)에 나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직후의 화사졸족(華士卒族)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6%였다.</ref> 번이 위치하고 있는 가고시마의 토양은 대부분 수질이 나빠서 경작이 곤란한 시라스 대지(シラス台地)였기에 토지는 척박하고 겉으로는 고쿠타카 77만 석이라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35만 석 정도의 수익을 내는 정도에 그쳤다. 게다가 남서쪽 섬들에서는 이따금씩 태풍이나 화산 폭발 등의 재해가 자주 발생했기에 초기 사쓰마 번의 재정은 궁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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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에도 막부의 유력 번에 대한 약화 정책 아래 대규모 막부가 시행하는 잦은 토목공사에 사쓰마 번이 동원되어 재정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호레키]](宝暦) 3년([[1753년]])에 발호된 기소(木曽) 지역 3개 하천에 대한 개수 공사(호레키 치수 사업宝暦治水)에서는 공사에 투입된 막대한 자금(40만 냥)을 공사 현장과는 멀리 떨어진 사쓰마 번에서 전액 부담해야 했고(목수 등의 전문 직공을 고용하는 것도 일절 금지되었다), 번의 재정은 그야말로 파탄 직전에 처했다. 40만 냥에 이르는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오사카]]의 거상에게 빚을 지기도 했고, 파견된 번사들은 과로 또는 전염병으로 병사하거나 막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할복하는 번사도 있었다. 사쓰마 번의 가로(家老) 히라타 유키에(平田靱負)는 이러한 다수 희생자 발생(최종적으로 벙사자 33명에 자살한 자는 52명) 및 번의 재정 피폐의 책임을 지고 공사가 끝난 뒤 자결하였다.
 
8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시게히데]](重豪)는 그때까지의 폐쇄적인 번정(藩政) 개혁에 나서 [[안에이]](安永) 2년([[1773년]]) 번교조사관(藩校造士館)과 연무관(演武館) 설립에 착수하고, 의학원(医学院)이나 명시관(明時館) 등도 세웠으며 농업 장려를 위해 농업 관련 서적인 《성형도설》(成形図説, 전100권) 등의 각종 서적 편찬 사업에 나섰다. 또 막부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서 셋째 딸인 [[고다이인 (1773년)|시게히메]](茂姫)를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이에나리]](家斉)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는데,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 가운데 쇼군의 정실을 배출한 것은 사쓰마 번이 유일했다. 이러한 갖가지 호사스러운 사업으로 인해 사쓰마 번의 정치적 영향력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번의 재정도 그만큼 빈궁해져 갔다.
 
그 뒤 [[분세이]](文政) 10년([[1827년]]) 주쇼 히로사토(調所広郷)를 중심으로 하는 번정 개혁이 단행되어, 번의 채무 정리나 사탕 전매제 강화, 류큐 교역 확대 등의 조처로 사쓰마 번의 재정은 호전되었다. [[가에이]](嘉永) 4년([[1851년]])에 11대 번주가 된 [[시마즈 나리아키라|나리아키라]](斉彬)의 치세 아래 서양식 군비나 번이 운영하는 공장의 설립을 추진하고(집성관사업集成館事業) 수양딸 [[아쓰히메]](篤姫)를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이에사다]](家定)의 정계실(正継室)로 보내는 등 사쓰마 번은 막부 말기의 실력자로 대두하였다.